태방 2007. 5. 3.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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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3일 오후 2시

  D2를 샀다. MP3도 되고 PMP도 되는 기기다. 비쌌지만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남는 시간에 책을 읽어도 좋지만 책만 읽기는 너무 지루할때가 있다. 요즘은 뭘 읽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덕분에 거금을 주고 MP3를 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메모리도 도착했고 해서 동영상을 가득담아 집에서 나왔다. 서대문에 일하러 가야한다. 어제 갔어야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오만가지가 귀찮아서 저녁 약속이 있을때 까지 집에서 뒹굴뒹굴 거렸다. 약속이 덕수궁 근처였는데 서대문에 미리 가서 일했으면 걸어서 10분 거리였을것을 또 귀찮에 오늘 또 나오다니 나도 참 바보같다. 그래도 귀찮은걸 어떡하나 하릴없이 하루 또 째고 일이 밀려 욕먹느니 그냥 어제 입던 옷 주섬주섬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까지 가는 길에는 음악을 들어야 한다. 걸어가며 동영상 보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뭘 들을까 이래저래 뒤져보다가 박정현을 들었다. EQ가 너무 귀를 찌른다. 휴대폰에 있던 MP3는 소리가 너무 귀를 찔러 오래 들으면 귀가 피곤했는데 이번에도 셋팅이 별로인지 귀가 찌른다. 셋팅하는거도 복잡해 죽겠던데 또 언제 하나 걱정이다. '아무말도, 아무것도'가 나온다. 박정현 노래는 예전부터 좋아했다. '편지할께요'는 정말 불후의 명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찡해지기도, 또는 아련해지기도 하는 기분은 박정현의 노래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기분이다.

  군포역까지 도착했다. 집에서 10분정도 걸리는 거리다. 나는 맨날 다녀 별로 안멀다고 느끼지만 걸어서 10분이라 그러면 사람들이 다들 먼데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걸어서 10분 거리가 그리 귀찮은 거리인가? 현대인들이 어지간히 걷는서 싫어하는거 같기는 하다. 뭐 나라고 움직이는거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국토 대행진 이후 걷는게 재미있어 졌다. 살도 빠진다니 일석 이조 아니겠는가? 이따가도 또 걸을일이 생겨 하루 계획이 왠지 기분이 좋게 짜여진 기분이다. 역앞에 서자마자 다행이 전차가 전 역을 출발했다는 메세지가 뜬다. 플렛폼에도 사람이 없는걸 보니 오늘도 앉아 갈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동영상은 'Sex and the City'를 담아왔다. 앉아서 가면 편안히 볼 수 있겠지? 괜히 또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나 자리가 많다. 낮이라 햇볕이 안드는 자리를 골라 앉고 D2를 다시 킨다. 야동만큼 낮뜨거운 장면의 연발이나 이상한 내용이 있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목값은 할 정도로 19금 내용들이 종종 나온다. 뭐 미국인의 생활이라니 그려려니 하며 드라마를 즐기지만, 헹여나 옆사람이 볼까 좀 두렵다. 역시 'Sex and the City'는 좀 무리였나? 담번에는 프리즌 브레이크를 담아와야 겠다. 그래도 철판깔고 보던건 다 봐야지 하고 시즌 2 5편을 끝내고 이내 6편도 킨다.

  서대문 역 앞인데 드라마가 끝날 기미가 안보인다. 기여코 보기위해 걸어가면서도 액정에 눈을 띠지 않는다. 걸어가다 걸어가다 사무실 바로 앞에서 다행히 끝난다. 전원을 내리고 이어폰 줄을 돌돌 감아 가방에 넣고 문을 연다. 신발이 하나밖에 없는거 보니 대표님은 안계신가 보다. 회의록 써온다고 해놓고 안써왔는데. 빨리 들어가서 오시기 전에 끝내야 겠다. 컴퓨터는 또 말썽이다. 중간에 부팅이 되다 말아서 10분이고 20분이고 마냥 손 놓고 멍하니 있다. 일주일만에 보는 다른 직원분께 인사를 하고 잡담을 하지만 컴퓨터가 안되니 멍하니 지겹기만 하다. 어떻게든 고쳐봐야지 하고 키보드 줄을 꽈악 다시 끼고 전원을 켰다. 나는 안된다고 푸념을 줄줄 외고 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너무 멀쩡하게 잘돌아간다. 역시 키보드 줄이 문제였나? 옆에 직원분이 껄껄껄 웃으시며 다시 자기 일을 하신다. 조금은 민망하지만 뭐 대순가? 회의록을 한줄한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록은 내용은 별로 없어 보였는데 다 만들고 보니 네페이지나 된다. 다음번에 인쇄하려면 고생좀 하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좀 줄일게 없나 둘러보지만 뭐 영 보이질 않는다. 에이 몰라. 그려려니 하고 자료집 편집을 시작했다. 책 만드는일은 언제나 즐겁지만 언제나 귀찮기도 하다. 자료를 하나하나 뒤져가며 글을 만드는게 만들고 나면 뿌듯함은 엄청나지만 그 중간중간 노가다는 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찮다. 힘들거나 어렵거나 하지는 않지만 짜증나고 귀찮은 일들 투성이다. 역시 투덜투덜대며 내일 열심히 해야지 마음을 먹고 싸이를 킨다. 파도를 타고 넘실넘실 돌아다니던 중 대표님이 들어오신다. 다행히 회의록을 다 썼으니 책임은 다 했다. 하지만 대표님은 회의록보다는 자료집에 더 관심이시다. 아 아까비. 자료집 열심히 만들라는 말을 듣고 귀찮아 귀찮아를 속으로 연발하며 다시 한글 2002를 킨다.

  오늘은 대표님과 직원분이 같이 약속이 있으셔서 나가시는 날이다. 나 혼자 남겨지기는 처음이다. 나보고 문단속 하고 가라고 하신다. 이런일은 처음이지만 뭐 어려운일은 아니니. 인사를 드리고 나니 혼자남은 사무실에서 왠지 평온함이 느껴진다. 나른하지만 편안해진다. 그래도 배는 살짝 고픈걸? 옆방에 주방이 있다. 먹을만한건 계란뿐. 난 그래도 계란을 좋아하니! 식용유가 보이질 않아 참기름을 붓고 계란 두개를 까서 훌렁 후라이로 먹어치운다. 아 역시 계란후라이는 맛있어. 케찹도 칙칙 올려 먹고나니 속이 든든하다. 편하게 쉬고 싶지만 그래도 집까지 한시간이나 걸리니, 짐을 꾸리고 문을 잠구고 사무실을 나왔다. 밖이 벌써 어둑어둑 해지려고 그런다. 나가는 길에 잠시 시청 광장을 들렸다 와야 한다. 우리 행사를 할 곳 자리를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서대문에서 나와 시청이 어느쪽인지 살펴본다. 나는 방향치라 지도를 봐도 도통 어디인지 해깔린다. 그냥 한곳 찍어서 주욱 가봤다. 번화가가 보이길래 시청이 있겠거니 했는데 마침 그방향이 맞는거 같다. 두블럭쯤 걸어가니 어제 모임을 했었던 덕수궁에서 종로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제부터 익숙해지니 왠지 기분이 으쓱으쓱 해진다. 다시 D2를 꺼내서 허밍어반스테레오를 튼다. 이 가수 노래를 들으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거 같아 별로 키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다들 그러지 않나? 노래마다 추억 하나씩 담아놓는거. 나도 그런 노래들이 종종 있다. 그런 노래들을 즐겨 듣기는 하지만 노래 들을때마다 추억이 떠올라 왠지 기분이 쓸쓸해지기도 한다. 추억은 언제나 기분을 쓸쓸하게 한다.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제 왔던 길의 밑천은 다 떨어졌다. 이제부터 시청을 찾아가야 하는데 도통 방향이 써있지가 않다. 시 의회 근처에 시청이 있겠지 싶어 의회쪽으로 걸어갔다. 이어폰에서는 좋은 노래가 계속 나온다. 허밍어반스테레오가 이렇게 좋았었나? 서울의 밤거리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귀에 꼽혀있는 올챙이 두개가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산지 2년된 MX500이어폰. 망가질 때도 되었지만 둥둥둥 여전히 좋은 소리를 내준다 아 정말 잘산거 같아.

  어디선가 사람이 우글우글한 장소가 보인다. 아 저기가 시청 광장이구나. 행사가 있는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하이 서울 페스티벌' 행사중 하나인것 같다. 시민 스타? 잘 안보이지만 서울 시민 대상 노래대회 같은거 같다. 민요를 부르고 있는 팀.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보다 너무나도 푸른 잔디를 보고 잠시 놀란다. 너무 인위적인 색이라 페인트로 뿌렸나 의문이 들정도이다. 설마 그랬을라고 싶지만, 이런 잔디를 깔 정도면 돈을 얼마나 들였나 싶다. 서울이 좋긴 좋아. 광장 한바퀴를 편하게 걸어간다. 너무 깔끔하고 이쁘다. 뭐 다 돈지랄이겠지만 그래도 좋은건 좋은거지 의자도 맘에 들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맘에 든다. 다들 잔디밭에 앉아 주부들, 학생들, 그 외의 다양한 시민들이 팀을 꾸려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있다. 페스티벌이라, 그런걸 즐길 정도의 사람들이면 어지간히 속편하게 사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학교 축제도 즐길줄 모르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아 이번에는 학교 축제를 못보게 생겼군. 포항은 싫어도 축제는 좋았는데. 돌다보니 분수대가 나온다 아이들이 좋다고 뛰어다니고 연인들은 서로 꼭 붙어 분수를 바라보고 있다. 연인? 분수? 뭔가 어울리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연인들 볼때마다 드는 생각인 '나도 사랑'이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지나갔지만, 허밍어반스테레오 노래가 귓가를 때리는 동안에는 그냥 지나가는 생각들중 하나이다. 뇌 주름을 풀어버리고 편하게 다시 광장 한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한바퀴를 다돌고 지하철로 들어갔다. 아 지상을 편하게 걷다가 콱막힌 지하로 들어오려니 이거 영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나에겐 D2가 있지 않는가! 동영상으로 버텨가며 시청역에서 군포역까지 갈 생각을 한다. 48분? 흠 두편은 볼 수 있겠다. 다행이야. 이번에는 깔끔하게 내리기 전에 다 봐야지.

  역시 금정역에 왔을때 두편째가 끝났다. 옆사람에게 성행위 장면이 보일까 여전히 걱정은 했지만, 재미있으면 장땡이다. 그런 드라마인데 어쩌라는 건가. 미국에서는 저 드라마가 공중파에서 나왔을텐데. 애써 위안 삼으며 MP3를 가방에 넣고 역에서 나온다.

  문득 드라마를 보고 나니 또 온갖 삼라만상이 다 떠오른다. 허밍어반스테레오를 틀어도 이번에는 생각이 지나가지를 않는다. 사랑? 사랑? 맨날 지겹게 사랑타령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사랑. 내 사랑에 요즘 문제가 좀 많다. 그래서 맨날 생각하고 고민하고. 하루종일 사랑 사랑에 치여서 살아 가고 있지만 드라마를 보고나니 기분이 또 영 꿀꿀하다. 별 쓸데없는 생각인지 알면서도 또 혼자 한숨 푹푹 내쉬며 집가지 터벅터벅 걸어간다. 가는 길에 야구연습장이 보인다. 평소였으면 돈낭비야 이러면서 애써 무시하고 지나갔을테지만 갑자기 지갑에 천원을 확인하고 동전으로 바꿔 철조망 안으로 들어간다. 음악은 빼고 싶지가 않다. 허밍아 내 머리가 더 복잡해지지 않게 붙잡아 다오. 가방을 던져놓고 동전을 넣는다. 에이 뭐야 장갑이 없잖아. 그래도 너무 치고싶었던가 보다. 방망이를 들고 휙휙 휘두르기 시작한다. 자세는 영 아니지만 오늘따라 공이 잘 맞는다. 공을 끝까지 보고 위쪽으로 치려고 집중한다. 공이 계속 잘맞는다. 기분이 좋다. 손은 좀 쓸려서 아프지만 멍했던 정신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신나게 치고 팔이 얼얼거릴때 쯤 공이 나오질 않는다. 전혀 아쉽지가 않다. 철조망을 나오고 걸어나가자 이상하게 기분이 시원하고 후련하다. 내 고민은 전혀 풀리지 않았지만 이런 자극이 나를 시원하게 한다. 공을 끝까지 보니 방망이에 맞는구나. 또 괜히 별거 아닌 일에 나를 대응 시켜 본다. 공을 끝까지 보자. 공을 끝까지 보자. 더러운공들, 지나가는 공들 다 버리고 끝까지 내공을 보자. 안타 한방이면 된다. 지나간 공은 이미심판이 스트라이크란다. 1루도 한번 못밟아 본 사람이 스트라이크에 항의하고 있어봤자 영 아니다. 그래 공을 끝까지 보자. 한방만 치자. 한방만 치면 그때부터 나는 강타자가 된다. 다행히도 허밍어반스테레오는 내가 다음 한방을 치기위한 워밍업을 할때까지 내 곁에서 계속 노래를 들려 주었다.

2007년 5월 3일 저녁 9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