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상의 반전이라는 것은 어느날 소리소문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얼마전까지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면서 조금이나마 자살을 상상하기도 하던 내가 이렇게 다시 밝은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이리저리 쉽게 바뀌곤 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그런 반전들 속에서 다시 원래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책 한권, 편지 한통, 그리고 소중한 친구와의 전화 한통에 나는 다시 나의 모습을 되찾았다. 라일락 향기가, 펜글씨 한장이, 그리고 6천원쯤의 투자로 보낸 친구와의 한시간 가량의 통화가 무언가 나에게 변화를 주었다. 라일락 향기를 맡은건 한 열흘 전쯤이었다.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책 한권을 알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도서관에서 빌려봐야지 하고 넘겨버리기도, 책이 연체가 되서 빌릴 수 가 없을텐데 어쩌냐하고 또 넘겨버리기도 할 책이었다. 하지만 CD를 사러 간 시내의 서점에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그 책을 찾아보았다. 제목부터, 작가부터 심상치가 않은 책이었다. 생각보다 책은 컸고, 글씨는 적었다. 멀쩡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책을 사는데 100번쯤은 주저 했으리라. 물론 나도 그러했다. 아무리 내가 통장에 아직 잔고가 두둑했다지만 책 사는데 돈을 흔쾌히 투척할 정도의 위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책은 달랐다. 책에서 라일락 향기가 났다. 사은품이라는 이름과 함께, 아름다운 꽃 그림과 함께, 아름다운 책들의 글귀와 함께 놓여있던 라일락 향의 책갈피. 그 향기가 나도 모르게 책을 들어 계산대로 향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지갑을 꺼내 카드를 꺼내 책을 계산하게하고 또 가방에 집어넣게 했다. 책이 상할새라 가방이 있었는데도 쇼핑백을 달라고 했다. 직원은 당황해 하지만 나에겐 단지 잔돈이 귀찮은 일 정도에 불과했다. 라일락 향기를 상상하며, 책의 향기가 라일락 향보다 진할 것을 상상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탔다.
책의 포장을 쉽게 뜯지는 못했다. 포장 속에서는 강한 꽃의 향기가. 사람의 향기가, 사랑의 향기가 나를 잡아먹기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았다. 별것 아닌 책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책을 열어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책은 옆에 고이 놓아두고 나는 하릴없이 책보다는 조금 가벼운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별것도 아닌 하지만 무언가 엄숙해야 할 것 같은 책을 열어야 할 시기에 대해 저울질 하고 있었다. 드라마 두편을 보고 침대에 눕고나니 책을 열어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번에도 내 손이 책으로 스르르 끌려 들어가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머리의 반응이 아니다. 그냥 책을 피고 책갈피의 향기를 한번 맡고 책 속의 문자들을 하나하나씩 탐닉해 들어간다.
내용은 별거 없다. 그림도 별거 없다. 향기도 사실 길거리에서 파는 천원짜리 라일락향과 다를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대 난 기분이 몹시 울적해 있었고, 내 맘속의 무한한 욕구의 억제가 자리잡고 있었고, 답이 있는 문제를 애써 도망다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책은 나에게 좀 더 진솔하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고, 또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절대 명령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작가의 말을 마치 신의 메세지 인냥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내가 잘못되었고, 내가 실수였고, 내가 바보같았다고 자책하며 나를 부정하고, 내 선택을 모두 뒤엎으려 하고 있었다. 되도않는 나에대한 변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 가지고 있던 스트레스가 엄청났었다. 작가는 나에게 너의 본 모습을 생각해보라, 너의 진실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행동하라고 나즈막히 말하고 있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평소에 봤으면, 남들이 봤으면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의 조합일 수도 있었고, 되도않는 세상에서 혼자 주절거리는 망상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메세지들은 라일락 향과 함께 내 가슴속에 조용히 다가와 마음의 문을 열게 했다. 이번에도 내 의지는 아니었다. 나는 몇달간의 방황을 끊고 나조차 잊고 있던 나의 원래 모습으로 생각보다 빨리, 그것도 순식간에 돌아가 버렸다.
편했다. 책을 읽은것도, 느낀것도 모두 편했다. 본연의 나로 돌아온 자체가 너무나 편했다. 본연의 나?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떠올랐다. 라일락의 향, 편안함, 그리고 시. 전하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고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원래 나는 조금 유치하지 않았는가? 나쁘게 말하면 느끼한 거지만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라고 해 두겠다. 시를 담아, 편지를 담아, 책을 담아, 그리고 라일락의 향기를 담아 조용히 소포를 보냈다. 책값보다 비싼 소포값이었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내가 보내주고 싶었던 것을 그녀가 받지 않아도 좋다. 그냥 지금의 내가 편했고, 그 책을 보내면 더 편해 질 것 같았다. 그 편지를 보내면 더 편해질 것 같았다. 왠지 내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항상 그렇다 친구끼리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에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냥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것 뿐, 그리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주는 것 뿐, 아니면 마냥 끄덕거려주는 것 뿐. 그 친구도 그런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도 그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해준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나의 모습을, 그리고 그렇게 버리려고 했던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버림을, 그리고 조금은 유치하지만 내 맘대로 저질러 버린 내 행동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말하고 싶었던 내 가슴속의 무언가들을 그 친구에게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친구는 나의 불안함에, 나답지 않은 모습에, 나의 좌절에 그동안 많은 걱정을 했었다. 물론 내 심정을 이해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냥 친구니까 들어주고 생각해주고 끄덕거려 주었으리라.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 돌아온 내 모습을 알게되니 조금은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믿을 구석이 생겼다. 친구가 안심을 해주니 나도 더욱 안심이 되었다. 나의 모습에 불안해하며 그동안 방황했던 나인데, 그런 내가 다시 방황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던 나에게 친구의 안심은 큰 힘이 되었다. 확신은 아니지만 믿음은 생겼다. 딱 마지막이라도 좋다. 지금 불타고 믿음을 잃어버려도 좋다. 하지만 처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어떻던 간에 아무 생각없이 편하게 사랑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건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가 나에게 준 선물은 라일락 향을 선물해준 책의 작가만큼 따뜻하다.
다시 난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신감이 넘치던 나의 모습으로, 열정이 넘치던 나의 모습으로, 하지만 여전히 다혈질이고 정신없는 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웃으면 복이온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내 생활을 웃게 하니 인생에도 작은 복들이 하나하나씩 다가오는게 느껴진다. 메마른 감성도 되찾기 위해 책을 하나 집어들었다. '냉정과 열정사이' 쥰세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는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 하지만 그리움속에서 슬픔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버리지는 않는다. 희망이 있건 없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만을 바라본다. 단지 그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그동안 사랑속에서 목표를 찾고 희망을 찾고 욕망을 찾던 나의 모습이 못나게 떠오른다. 기다릴줄도, 믿을줄도 알아야 하는 사랑을. 아니 그런것 없이 그냥 사랑을 위한 사랑이 필요했었던것 같다. 다시 또 나를 자책하지만, 그래도 더이상 방황하진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비록 너와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다시 보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속에는 언젠가 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미래의 약속을 담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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