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무언가 슬프면서도 행복한 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다는거 만큼 만족스러운 것도 없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움직일때 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지문 인식기에 찍히는 퇴근도장의 미묘한 기분은 직장인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9시 이후에 퇴근할때마다 야근 수당이 얼마일까만 고민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이제 나도 직장인 다 되었다 싶지만 그래도 회사에서는 아직도 마땅히 하는 일은 없다. 천천히 지나다보면 일이 주어지겠지. 뭐 그건 중요한 일도 아니다 난 일단 퇴근했다. 당당히 퇴근하는 길이기 때문에 오늘은 계단으로 몰래 내려가지 않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군포역까지 걸어서 15분, 꽤나 먼거리지만 난 언제나 걸어간다. 군포역까지 퇴근 버슥 운행되지만 왠지 타고 싶지는 않다. 한번도 타본적이 없어서 두려워서이기도 하고, 아직은 그정도쯤은 걸어 다닐 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냥 귀찮아서라 해두자 언제 올지도 모르는 차 기다리느니 그냥 걷고 만다. 군포역 가는 길은 공단이 많다. 나보다 훨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하는 일은 일도 아니겠지? 너무 편한 인생만 살아왔으니 지금의 내 불평불만은 최대한 가슴에 담아두고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힘든건 힘든거, 정말로 누구나 가슴에 상처하나쯤은 있는거니까. 그렇다고 그 상처를 버리고 살 수는 없다. 누구나 상처 하나쯤 있는 만큼 누구나 그 가슴의 꽃한송이는 고귀하고 소중하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그냥 군포역 가는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저녁을 못먹을거 같아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김밥 두개와 보너스로 주는 바나나 우유를 하나 산다. 삼각김밥이고, 라면이고, 피자고 하는 음식들은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전적으로 과거의 먹던 추억이 몸에 배여 먹는 음식들이다. 어렸을때는 그리도 맛있는 음식들이었는데. 라면은 지금먹으면 맛이 정말 별로 일때가 있다. 요즘은 국밥이 맛있다. 나도 늙었나보다 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입맛이 바뀐건 분명 맞을 것이다. 삼각김밥 역시 기분 좋게 샀지만 맛은 별로 였다. 고등학교때 몰래 학교에 나와서 컵라면과 사먹을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그래도 싸니까 먹는다.
군포역에 도착한 시간은 6시 28분. 걸어오는데 20분 가량이나 걸렸다. 7시에 가는 모임인데 왠지 느긋하다 군포역은 아무리 바빠도 나에게 여유를 주는 광경이 있다. 개찰구를 나가 왼쪽으로 두번 돌아 내려가면 내가 자주 가는 탑승구가 있다. 그 자리에서 항상 바라보는 나무와 풀들, 건너편 출구, 백원짜리 소주를 파는 술집, 고시원, 시장, 그리고 기찻길. 항상 같은곳에서 기다리면 항상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이어폰을 잃어버려 MP3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음악을 고르곤 했었는데. Muse, Clazziquai, Steve Barakkat. 그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 음악들 만을 골랐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별 쓸데없는 생각들에 잠기다 보면 시간은 빨리가고 기차는 금방 온다. 시간을 계산하며 '또 늦었군'을 혼자 외치고 기차에 올라타 앉을 자리를 둘러본다.
자리가 없다. 그래도 이시간때 치고는 사람이 없어서 곧 자리가 생길것 같다. 오늘은 충무로까지 가야해서 앉아 가고 싶다. 책을 핀다. 상실의 시대. 번역체는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일본 문학을 이렇게 빨려들어가며 읽게 된다니 신기하다. 재미있다. 재미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염없이 책을 읽어간다. 피로때문에 뒷목이 땡기지만 그래도 멈추지를 못한다. 앞에 자리가 났다. 바깥 광경을 못봤지만 그래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음악을 듣던 즐거움이 책으로 옮겨 간듯한 기분. 회사에서 하루종일 숫자와 회로만 보던 나에게 책은 조용한 해방을 준다. 서울역이 다 와갈때까지도 책이 두꺼워 반도 못읽었지만, 마치 더 자야할 잠을 자다 만 기분으로 책을 덮고 4호선으로 갈아타 충무로로 향한다.
누구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날. 강연따위는 관심없다. 오로지 사람, 사람을 원한다. 나와 몇달 몇년간 함께했던 사람들, 그들이 없으면 미쳐버리기에 미치지 않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간다. 힘들고 지치지만, 왠일로 저 안쪽 구석에 있는 건물이지만 힘들지가 않다. 지하철 타고 한시간, 걸어서 20분을 더 들어가는 동안 땀은 한바가지를 흘렸지만, 문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금새 웃음이 난다. 대화 하는것 만으로 날아갈 듯이 기쁜 시간들, 취직하기 전 하루 종일 그 시간들과 함께 했었다는것 자체가 이제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배불렀던 시간들, 내 인생의 무한한 해방감을 주었던 시간들, 이제 그 시간들을 뒤로하고 회사일에 전념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회사일이 싫은건 아니다. 하지만 하루종이 이눈치 저눈치 보고만 있노라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느껴진다. 조직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져야 하는건가? 조직은 누구를 위한 조직인가? 나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인가? 먼저 들어온자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건가? 쓸데없는 고민들속에서 살아가지만 난 그래봤자 신입사원일 뿐이다. 그곳을 탈출하여 나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화 하고 있자니 이건 사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강연은 한자도 안듣고 밖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과 농담따먹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뒷다마도 까고 하면서 보내는 시간들, 예전에는 쓸데없다고 느꼈던 시간들이 지금은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시간들도 그들에게는 평범한 시간들일 뿐이다. 나의 감격이 그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고, 술한잔이라도 하고 싶은데, 나의 감격은 도통 전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화가 많이 났다. 나는 눈치 봐가면서 어떻게든 일찍 퇴근해 한시간 넘게 차를 타고 도착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사용하고 싶은데, 나를 반겨 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들 일이 있어 집에 일찍 간다. 그뿐이다. 그들의 삶속에 내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 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다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 뿐이다. 오늘 처음으로 뒤풀이에 따라가지 안았다. 뒤풀이에 안가는 마음을 먹으면서, 나 스스로 이 행복을 끊는 실험을 한번 해보았다. 지하철 역을 내려가는 동안 아쉬움이 넘쳐 나를 짓눌렀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마음 먹지 않으면, 이 행복속에 내가 중독되어버릴까봐 일부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띄며 지하철에 몸을 담았다.
역시 또 책을 폈다. 이 시간대에 또 사람이 별로 없다. 앞에는 한 커플이 나란히 앉아 즐겁에 이야기를 나눈다. 저 여자가 가고 내가 저기 않으면 남자의 행복을 뺏는 일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던 찰나 여자가 일어나 자리가 생겼다. 앉고나니 옆의 남자에게 왠지 미안해 졌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다시 책을 폈다. 아까 아는 형이 책 내용을 미리 스포일러 해버려서 조금 흥미가 떨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그래도 역시 재미있다. 야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상실의 시대는. 섹스앤더 시티 드라마도 그려려니 하며 봤던 나지만, 상실의 시대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무난히 읽는다. 이런거에 무뎌진걸까? 아님 상상력이 풍부한걸까? 나 스스로를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있긴 하지만, 뭐 그건 그거대로 넘기고 책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의 상상력을 인정하고 보는 것이 책을 더 즐겁게 즐기는것 아닐까? 말도 안되는 내용들도 말이 된다 생각하고 즐기니 책이 한결 부드러워 졌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간다. 온통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들 뿐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이다. 그 사실들을 인정하고 책을 읽고있자니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나의 모습이 조금은 걱정이 된다. 그래도 읽는다. 책을 읽은 한시간동안 아무 생각없이 책장을 넘기는데만 몰두한다. 책에 빠져있으면 무언가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하다. 문학은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작가의 세계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면, 현실의 사람들은 전부 단순무식용감한 사람들로만 비춰진다.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감수성을 담아 책을 읽고 있자면 현실의 인간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 없다. 문학을 느끼지만 느끼는대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은 외로움을 안겨준다. 문학은 그래서 외롭다. 빨리 책을 다 읽고 술한잔 하며 감상에 잠겨봐야 겠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금정역을 나온다. 책을 덮고 역을 나오니 와타나베가 나오키가 있던 요양원을 나오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왠지 그런 기분이어야 할 것만 같다. 책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계속 읽고싶지만 내일 출근을 해야하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속물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꽤나 계획적으로 사는 편이다. 물론 계획한대로 살지는 않는다. 의지도 꽤나 부족한 인간이니까. 난 이런 내가 좋아 그렇게 산다. 하지만 이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거 같다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곤 한다. 현실의 나는 문학속의 주인공과 다른 모습일까? 문학의 주인공처럼 생각해도 그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꽤나 폼나는 외모를 가졌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겉포장이 이쁘면 열어보고 싶지 않을까? 아직 내 본질이 열려본적은 없는거 같다. 한번 정도? 다들 나를 열어보기도 전에 나를 버렸다. 아니 내가 나를 던졌다. 그래서 버려졌다.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나를 열어 보이는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전혀 흥미로운 인간도 아니고, 전혀 관심받을 인간도 아니고, 전혀 매력적인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다들 아니라고 하지만 결론을 보면 내 말이 맞다. 아무도 나에게 흥미를 주지도, 관심을 주지도, 매력을 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문학의 주인공 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나에게 맞지만, 로멘스따위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문학은 인간을 외롭게 한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금 그런 사랑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내 포장을 신경써야 할까? 아니면 행동? 아니면 내 안의 모습을 더 보여주려 노력해야 할까?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두렵진 않다. 그런것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도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내 감정을 조절 못하는것 보다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내 인생을 살고 싶은데 내 사랑속에서 나는 나를 억압해야 살아남은다. 그렇지 않으면 난 또 나를 던지게 되고, 나는 또 버려질 것이다. 마냥 즐거운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는데, 미래가 우울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에 다시한번 도전한다는 일은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지고 걱정스럽다. 크게 화상을 입은 일도 아닌데 화상을 입을까봐 조심스러워 진다는 것은 정말 슬픈일이다. 모르겠다. 항상 그렇지만 모르겠다. 나이 스물먹은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말도, 레이코의 말도 들어주는 마음 착한 남자이지만, 나에게는 그런말을 해줄 여자가 한명도 없다. 솔직해 지고 싶다. 솔직한 내 감정을 드러내고 싶다.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런거에 초연해 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주기도, 솔직하게 받기도 모두를 두려워 하는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씩 죽여나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때문에 힘들다.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지 못하고 조금씩 죽여가며 산다는건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다. 힘이 빠진다. 생각하면 할수록 힘이 빠진다. 그 자아의 크기가 의욕을 잃게 되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면 영영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전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것이 인생이라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고민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 나는 나도 모르게 일말의 의욕을 다시 찾을테고, 잘되면 장땡이고 못되면 난 또 일보 후퇴하겠지. 그 후퇴의 날이 언젠가 오게 될것을 두려워 하며 긴 장문을 마치고 나는 오늘도 불편한 잠자리에 든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