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근태 "6월 한미 정부간 협정 체결 저지에 매진하겠습니다"
▣ 김근태 前 열린우리당 의장의 FTA협상 마무리에 대한 입장 (4월 2일)
국민 여러분께 무릎 꿇고 말씀 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먼저 현직 국회의원이, 그것도 열린우리당의 전직 당의장이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형식을 빌려 의사표시를 한 데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런 현실이 답답하고 가슴 아픕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깡소주를 마시며 상황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곡기를 끊는 방법으로 항의하고 호소하는 일밖에 없다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현직 국회의원의 심정이 이러할진대 국민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간절한 호소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급하고 아쉬워서 졸속으로, 그것도 미국의 요구대로 타결을 선언했는지 상식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세 번이나 미국의 ‘시한연장 놀음’에 휘둘려 국가의 위신을 땅에 떨어트린 일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밉니다. 이는 국가의 자존을 훼손한 일이며, 중산층과 서민을 정면으로 배신한 행위입니다. 눈앞이 아득해집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우리 사회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는지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에는 협정체결이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에 대한 찬반여론이 팽팽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문제만큼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 사안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격렬한 분위기에 비해 논쟁의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협상 정보는 정부 관계자들이 독점하고, 정치권과 국민들은 귀동냥에 의존해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의회’와 ‘여론’이라는 지렛대를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는 미국 측의 움직임을 보노라면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보다 더욱 기막힌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일부 관료와 일부 보수언론, 일부 정치권이 삼각동맹을 맺고 펼치고 있는 저급한 이데올로기 공세입니다. 이들은 한미 FTA에 대해 우상숭배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시한에 쫓겨서는 안된다’는 최소한의 주장, 합리적인 주장조차 쇄국주의자, 개방에 반대하는 철부지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협상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한미 FTA를 하면 나라가 살고,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외눈박이 식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10년 전에도 그런 주장을 들어본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일부 경제 관료들이 앞장서고, 일부 언론, 신한국당이 앞장서서 똑같은 논리를 펴면서 무리하게 OECD 가입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고려도 없이 장단기 자본시장을 모두 열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갑작스런 외환 유동성 위기를 맞았고, 결국 IMF 외환위기라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지금 한미 FTA를 맨 앞에서 추진하고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때의 관료들, 그때의 언론들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한나라당 역시 같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둘째, 그 사람들이 그때 하던 말이나 지금 하는 말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셋째, 그때 외환위기를 불러온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저 사람들도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방이라는 외부의 충격이 있어야 내부의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OECD에 가입할 때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틀린 말입니다. ‘개방’은 옳은 길이지만 ‘묻지마 개방’은 틀린 길입니다. ‘조절된 개방’ ‘조절된 세계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국민은 실험실의 쥐가 아닙니다. ‘묻지마 개방’으로 IMF 외환위기를 겪었으면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개방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매우 신중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그게 IMF의 교훈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10년째 ‘묻지마 개방’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구조적 저성장과 심각한 사회양극화의 늪에 빠져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제 그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IMF 외환위기의 결정적 책임을 져야할 일부 관료와 일부 언론들이 다시 전면에 나서서 ‘충격적인 개방정책으로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은행이자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사채이자를 끌어다가 빚을 갚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엄청난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단식을 풀고, 거친 광야로 나가려고 합니다. 협상이 타결된 만큼 이제 호소하는 시간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호소를 외면한 정부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저지하기 위해 행동해야할 시간입니다.
먼저,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해 협상 결과를 파악하고, 정부 관계자들이 국민의 입장에서 협상에 임했는지 책임을 추궁하겠습니다. 권한에는 합당한 책임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그동안 정부 관계자들이 협상정보와 협상전략을 독점해온 만큼 책임추궁은 추상같이 엄하고 가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는 6월, 정부간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매진하려고 합니다. 남은 석 달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협정체결을 저지할 생각입니다. 정당과 국회의 울타리를 훌훌 뛰어넘어 정부에 협정체결 유보를 요구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떤 기득권이나 저 자신의 유불리도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열린우리당의 전직 당의장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 여러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가겠습니다.
정부간 협정체결을 저지해야 하는 이유는 간명합니다. 협정체결을 저지해야만 시간을 갖고 충분한 재협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재협상의 길은 봉쇄됩니다. 오직 찬성이냐 반대냐, 비준을 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만 남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한미관계는 특수 관계입니다. 양국 정부가 체결한 협정을 국회가 비준 거부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필요 이상으로 엄청난 긴장과 후폭풍을 몰고 올 것입니다. 이런 추가적인 어려움과 두려움 때문에 국회의 비준 검토과정이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따라서 국회비준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정부 간 협정체결을 유보하고, 정부와 국회, 국민이 함께 토론해서 재협상의 여지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한미 FTA의 협상결과를 우려하는 여야 각 정당, 시민사회단체가 일사분란하게 대응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데 제가 가진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모든 정당 · 사회단체 관계자의 연석회의를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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