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할말을 해야겠다. 김대중은 유신잔당과 야합했다. 노무현은 재벌아들놈과 손을잡았다.
그러고도 간신히 이겼다.. 그리고 당신네들이 신자유주의자라고 실컷 욕했던 그들이 임기내내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게 당신과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다...
당신네들이 입에 달고사는 민중들은 시궁창에서 구르고 있는데 홀로 독야청청하면 행복하신가...

------------ 딴지일보 기사의 '만수'님의 리플中

 

첫 정치글인데 뭐 이따구의 글부터 시작이냐만 참;;

그래도 뭐 ㅇㅇ 맞는말 진보신당이 지지율이 3%를 못넘기는 이유다

그들이 아무리 FTA하면 자동차쪼가리 팔아서 케찹에 밥 비벼먹는 세상이 온다는걸 제일 잘 알고 있어도

그들이 아무리 더러운 돈 한푼 안받아가며 경기도 지사 공보물을 저질의 B4한장짜리로 찍어도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고 정치판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그거 놓치고 정치하는건 정치인도 아니다

이세상엔 일찍 노무사 땄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가 운좋게 시의원 된 새끼도 보이는 거고

몇천만원 뿌려 지역구민 부페 차려주고 그표받아 시의원 된 새끼도 있는거라고



현실정치 - 이 단어 참 쓸데없는 단어다

다스릴 정, 다스릴 치 정치는 원래 현실이다. 이상정치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일 뿐이지

마르크스는 이론을 만들었고 레닌은 정치를 했다. 레닌이 과연 민중들을 욕했을가?

그는 똑똑했고, 민중에게 혁명의 매력을 보여줬을 뿐이다

너희들이 그간 민중들에게 진보신당의 매력을 얼마나 어필했는가?

노무현대통령 탄핵되고 다음 총선때 민노당이 정당지지율이 20%가 넘어갔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나왔고, 열린우리당에 몸담고 있었지만

국민들에게 맛깔나는 진보를 보여줬기 때문에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에 과감히 표를 던졌다

왜 너희들은 그런 매력을 스스로만들 생각은 하지도 않는가?

너희가 보여준 매력의 결과가 3%도 안되는 지지율인건 생각도 안하는가?



지금의 민노당은 안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그것이 진보의 매력인걸

김상곤 교육감이 '무상급식'단어 하나만으로 전국에 진보교육감 6명 만들어 냈다

민노당도 이제 지역 의회에서 공동지방정부로 그 매력을 보여주기 위한 첫 걸음을 준비했다

진보신당 너희들은 얼마나 준비했다고 이 상판위에 밥을 얹으려고 난리치는가?

진보? 원래 우리나라에서 힘든거다. 힘든거면 힘든거인줄 알고 도전하는게 정상 아닌가?

진보는 고귀하니까 힘들어서는 안되! 라고 외치고 싶은가?

그럼 민주화운동한다고 피철철 흘려가며 쓰러진 사람들은 너희가 살려낼껀가?

원래 힘든거다. 제발좀 인정하자. 나도 진보신당이 마음껏 정책을 펼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투표권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 민주당 찍고 찍고 또 찍고 그러는거다

국민들이 민주주의 맛을 봐야 진보맛을 보고 진보맛을 봐야 진보신당 너네가 클 수 있는 거니까





너네 잘못좀 했다 일단 욕점 더 들어먹고 있어라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by 태방 2010. 6. 4. 23:47

국사시간에 잠깐 들어본 단어일것이다. '화전'
빈 땅에 불을 질러 재를 만들고 그 재를 거름삼아 농사를 짓는 농법
가장 원시적인 농법으로서 몇번 농사를 지으면 땅에 양분이 남지않아 황무지가 되어
다른곳으로 옮겨가면서 농사를 짓는다

가난하던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땅을 수탈당하고 가진것없이 여기저기 전전하며
화전으로 생계를 연명하던 서민들이 많았다
가진것 하나도 없이 산골짜기 깊은곳에 숨어 들어가 임자없는 땅 먼저 차지하여 선을 긋고
그곳이 내땅인냥 불을 질러 나온 재를 쥐어짜듯 거름삼아
씨뿌리고 목구멍에 풀칠할 밥한풀 얻어내면 그것이 1년농사였다
그마저도 없으면 나무 뿌리 캐어먹고 산나물 캐어먹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며 일제의 수탈을 피해 도망다녔을 것이다

현대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불을 키는 세상이지만
밥통만 열면 기름진 쌀밥을 퍼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는 화전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중고 학창시절 한창 여기저기 뛰놀며 풍부한 감성을 얻어야 할 시기에
네모칸 작은 책상에 구겨앉아 흰것과 검은것이 번갈아있는 문제집만 수두룩하게 후벼판다
그래도 예전엔 고등학교때만 했지, 이제는 초등학교, 아니 입학전부터란다
조기교육에 입시준비라며 아직 김치도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는 애한테 과외선생님을 붙여준다
무럭무럭 자라나야할 땅에 온전한 거름을 주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활활 불타오른다
마른 풀위에 활활 타오르는 화전처럼 우리의 젊은 시절은 그렇게 아무 기초없이 그저 활활 타오른다

자식의 체력은 공부에 쏟고 부모의 체력은 등록금에 쏟아 대학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여전히 거름은 없다
지성의 요람은 어디가고 취업의 학원만 남아있다
면죄의 자유가 주어지는 4년의 시간동안 혈기왕성한 20대는 자유를 쓰는것보다 자유를 억압하는것부터 배운다
젋음의 향기를 지워가며 도서관에서 토익책을 들여다보며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누가 더 많은 땅을 불태우느냐 싸움이다 어짜피 올해 한해 입에 풀칠하는게 우리의 목표이다
내 영역을 넓히기 위해 옆사람의 영역을 빼앗는다. 먼저 자리잡은 사람이 화전의 임자이다.
내 스펙이 더 높으면 옆사람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더 좋은 직장을 차지해야 한다.
이땅이 좋으면 이땅이 좋다고 우루루 몰려간다 저땅이 좋으면 저땅이 좋다고 우루루 몰려간다.
그렇게 치열하게 물어 뜯는 전쟁을 계속한다

그렇게 노력하여 드디어 직장을 얻었다. 양분이 충만한 화전이다.
하지만 이땅의 양분은 한번 농사 지으면 모두 사라진다. 비정규직이다.
거름을 주지않은 땅에서 자란 곡식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라도 있어야 풀칠을 한다.
내가 얻을 곡식을 다 얻고나면 이 땅은 나의 땅이 아니다.
젋은 시절을 다 바쳐 얻어낸 소량의 곡식만 남고 나에게 가진것은 하나도 없다.
집한채, 차한대 뽑기는 고사하고 작은 가정하나 꾸릴 여유조차 없다.
꿈? 미래? 상상도하기 힘든 단어들이다. 이미 나의 화전은 지력을 상실하였다.
옆땅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명해야 한다. 알바를 뛰며 나무뿌리를 캐어먹는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얻은 것은 또다른 화전이다. 다시 반복이다.
그렇게 계속 태우고 계속 곡식을 얻으며 인생의 시간을 소비해 간다.

저 산 아래 넓은 평야 옆에 친일파 지주의 아들은
방금 한 따끈한 햅쌀밥에 떡갈비 한점 얹어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by 태방 2009. 11. 24. 21:07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내용이 발표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줄을 듣는순간 눈앞이 찡 해지더군요.

"마을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 달라."



그는 인권변호사부터,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기까지

가장 정치인 스럽지 않은 정치인이었습니다.

권모 술수를 모르고, 진실만을 외치며

그것이 통하기만을 바랐던 어찌보면 지나치게 순수한 인간

오히려 그가 대통령이 되었던것은 기적적인 일이 아닐 까 싶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순수하고픈 인간들의 희망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노 전대통령을 여러가지 이유로 욕합니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지극히 순진하였고, 솔직하였으며, 정직한 일들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욕하는 이유는 불순하고 오해하며 불확실 한 것들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의도했을 것이다.

그렇게 맘대로 추측하고 해석하며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이라 판명지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솔직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생각한다고 욕을 합니다.

순진하지 못한 사람들이 순진한 사람들에게 세상물정 모른다고 욕을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적당히 살지 못한다 욕을 합니다.

그는 대통령이 끝나고 오로지 시골의 동네 아저씨로서

읽고싶은 책을 읽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렇게 인간 노무현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 언론들은 그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봉화마을 저택 아방궁 파문, 전정권 자료 유출 파문, 측근 비리 파문, 가족 뇌물수수 파문

등 그를 흔들고 괴롭히며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모든일이 그와 관련이 되엇기 때문에 그에게 잘못이 있는거 아니냐고 말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소박하게 살고 싶어하는

그 꿈을 망쳐놓은것일 지도 모릅니다.

저택은 융자를 받아 지은것 뿐이며, 자료는 법적 절차에 따라 수집한것 뿐이며,

측근 비리, 가족 뇌물 수수는 밝혀졌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스스로가 수수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주변의 일을 원칙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내려긴 형벌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마을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 달라."

죽기 전까지 그 어떤 부도 명예도 권력도 원치 않고

소중한 이에게 작은 기억하나 되어 남고싶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소박하고 진솔하고 정직하고 원칙적으로 살고 싶어했던 한 인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의 서거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박하고 정직하고 원칙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떤 댓가를 치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사회의 치명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국가의 큰 슬픔입니다.

그리고 인간 노무현의 죽음은 소박하고 싶은 서민들의 큰 슬픔입니다.

우리모두 대한민국 사회의 죽음을 슬퍼합시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태방 2009. 5. 24. 16:22
경향신문 1면‘GG광고’에 담긴 숨은 사연은...
광고국 관계자 “<조선> 광고 사정 힘들긴 힘든 모양”
입력 :2008-07-01 13:58:00  
▲ 6월 27일 경향신문 1면 하단의 스타크래프트 팬까페 PGR21 의견광고 
지난 27일 경향신문 1면 하단에는 스타크래프트 팬사이트인 'PGR21'이 낸 "국민 지지(支持)를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장 GG를 치십시오"라는 제목의 대통령 비판 의견광고가 실렸다.

그러나 그 날짜, 한겨레를 제외한 주요일간지 1면 하단에는 경총과 전경련 등 경제단체의 '이제는 경제를 생각할 때입니다"라는 의견광고가 실렸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만 이 경제단체의 의견광고가 빠졌다. 경향신문에 전경련의 광고가 빠지고 스타크래프트 팬까페의 의견광고가 실린 것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이 광고가 나가기 전날인 26일, 광고비를 십시일반한 PGR21사이트 자유게시판에는 그간의 광고진행에 관한 경과글이 닉네임 '분수'의 이름으로 올라왔다. '분수'는 경향신문 광고가 나가기로 한 바로 그 지면에 경제5단체의 의견광고가 접수되었고, 그 가격차이가 무려 5배가 난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PGR21의 의견광고 추진팀은 다른 날짜로 광고를 옮기거나, 지면을 3면으로 바꾸는 등의 문제를 경향신문 광고국 측과 긴밀히 논의했다. 그들은 경향신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미 공지가 나갔고, 다른 팬까페 등에도 광고가 되었다. 우리 의견대신 전경련 광고가 나간다면 허탈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곡절 끝에 경향신문은 오후 6시쯤, 5배의 가격차이를 감수하고 PGR21의 광고를 1면에 그대로 싣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PGR21 사이트 댓글에는 환호성이 올랐고, 경향신문의 용기있는 결정에 대한 칭찬이 수십건 올라오기도 했다.

"승리의 경향.... 리플 캡춰해서 보내드리면 경제적 타격으로 우울해하실지 모를 (경향광고국) 담당자분들에게 힘이 되겠는데요...", "언론학 학도로써 경향의 선택이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고 얼마나 훌륭한 언론의 모습인지 더욱 절절히 깨닫고 있습니다" 등의 댓글로 경향신문의 결정을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경향 의견광고에 숨겨진 이 이야기의 또다른 비하인드 스토리를 시사주간지 '시사인'은 전하고 있다.

경제단체 광고와 PGR21 광고의 5배 가격차이는 "경총이 제시한 가격"과의 차이가 아니라 "경향이 부른 가격"과 5배 차이가 났다는 것이다. 경향 측은 당연히 '늘 부르던 정가' 그대로를 부르고, 경제단체 측에서는 '그 가격은 조선일보 광고가랑 똑같지 않느냐?'면서 "가격할인"을 시도했다는 것.

경제단체가 흥정을 제시한 가격표를 받아든 경향신문 광고국은 "그 가격이면 굳이 1면에 실을 이유가 없다"고 배짱있게 PGR21과의 의리를 지키게 되었던 것.

경향 광고국 담당자는 "우리는 그냥 평소대로 가격을 불렀다. 아마 조선일보 측에서 가격을 다운 시킨 것 같다. 그쪽이 힘들긴 힘든 모양"이라고 말했다.

하승주 기자
by 태방 2008. 7. 1. 17:13

'비폭력' 일깨운 사제단, "이명박도 사랑한다"

다시 그들이었다. 국가권력이나 금권에 의해 마땅히 지켜져야 할 가치가 왜곡될 때, 그들은 거리에 서 있었다. 지학순 주교에서부터 김용철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양심의 목소리가 태동될 때에도 그들은 자리를 함께 했다.

 

2008년 6월 30일 저녁,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미국산 쇠고기'로부터 촉발된 촛불시위가 전경의 군홧발에 의해 상상을 초월한 과잉폭력진압 속에서 피를 흘리자 서울시청 광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달을 조금 넘긴 사이, 시계가 순식간에 20~30년 전으로 돌아가버린 지금, 어쩌면 우리는 1987년의 그들을 기억하며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사제단은 저녁 7시 30분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미사를 진행했다. 천주교의 종교행사였지만, 이 행사는 반드시 천주교인만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자리에 앉아 촛불을 들고 그들의 미사를 경청했으며, 신부와 스님이 손을 맞잡으며 거꾸로 돌려진 시계를 걱정하며 시대를 걱정했다. 종교의 화합, 그리고 시민의 화합, 종교를 초월해 뜻을 모으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연출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경찰과 대비돼 더욱 빛난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은, 경찰의 변함없는 대처와 대비돼 더욱 빛날 수 있었다. 경찰은 또다시 전경버스로 시청 앞 광장을 봉쇄했으며, 미사 이전에 전경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인 시민을 "시민이 전경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강제연행했다가 항의가 이어지자 "경미한 폭행이었다"는 조금은 우스운 해명과 함께 풀어줬다.

 

1시간 가량 이어진 행진이 끝난 이후에도 정복경찰을 동원해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려다가 사제단 신부들의 간곡한 호소에 호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슬그머니 머쓱하게 철수했다.

 

수십년 넘게 단련된 양심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시민들이 그에 호응하면서, 경찰의 과잉대처는 오히려 개그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비폭력'의 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는 시민들에게 '간곡한 호소'를 남겼다. 늦은 시간까지 시민들이 전경과 대치하다가 피를 흘린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염려한 것 같았다. 밤 10시를 넘기면서 시민들에게 '귀가'를 호소했으며, "국민들에게 힘이 될 때까지 사제단이 단식기도회를 계속하겠다"는 선언도 남겼다.

 

나로서는, 이 선언이 가질 힘을 유추해보려고 노력했다.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그 영향력에 걸맞은 실천을 끊임없이 보여줬던 사제단이 시청 광장에 '계속' 남는 것만으로도 그 상징은 클 것 같았다. 그들은, '비폭력'이 가진 힘을 시위참가자와 경찰 모두에게 진실되게 보여줄 것이다. 안그래도 컸던 사제단의 존재, 더욱 크게 보였다.

 

미사 도중에도 사제단은 '사랑'을 이야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사랑하자고 주문했으며, '경찰 형제'에게도 사랑과 애정을 보낸다고 했다.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했"지만,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은 것 같았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했다던가? 진실된 목소리에, 시위참가자들도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자신의 힘과 교만을 탄식하면서도 자신에게 '사랑'을 주문하는, 신을 섬기는 자 본연의 목소리를 말하며 그 자세를 지킨 사제단으로부터 무엇을 느꼈을까? 참고로 오는 3일에는 개신교인들의 기도회가 예정돼 있다. 아마, 그들도 '힘'과 '교만'에 빠진 누군가를 탄식하며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할 것이다.

 

행진 후의 작은 축제들

 

행진 후의 시청 앞 광장은 말 그대로 '평화 속 작은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잔디밭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 단식농성을 시작하는 신부들을 찾아가 웃음꽃을 피우며 "힘내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시민들, 사제단의 자문 변호사로서 모습을 드러낸 김용철 변호사에게 사인을 받고자 하는 시민들, 촛불을 모으며 작지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시민들, 현장을 뜨지 않은 통합민주당 국회의원과 토론을 나누는 시민들, 시민과 종교인, 그리고 정치인까지 어우러진 작은 축제의 모습이었다.

 

진정으로 기다려왔던,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그동안 이어진 대치 속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눈 앞에서 지켜봐왔던 나로서는, 그 작은 평화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대하지 못하다가 눈으로 보면 그 소중함에 눈물마저 나는 경우를 살면서 종종 겪는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그 축제 속에서, 인터뷰를 시도하고자 하는 기자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 대열엔 나도 포함돼 있다. 다음은, 김인국 신부가 기자들과의 즉석 인터뷰에서 남긴 이야기들이다.

 

-오늘 이 자리(시청 앞 광장)에서 미사를 진행한 취지는 어디에 있나?

"시민들과 이명박 대통령 사이의 '소통 장애'가 무서운 그림자를 불러왔다. 시민들은 짓밟힌 자존감 속에서 감정이 격앙돼 있다. 시민들과 이명박 대통령 사이의 무서운 그림자에 호소하고자 한다.

 

-그동안 '폭력시위' 논란이 유발된 적이 있었다.

"'폭력'에 대해서는 시민들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시민들은 애초에 비폭력 기조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폭력을 유도한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공안기관의 강경기조도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이 아니라 기관장들의 '과잉'이라고 믿고 있다. 그속에서 촛불에 담긴 시민들의 마음을 지킬 필요가 있는 듯하다."

 

-특정 보수언론에도 목소리를 내세웠는데?

"우리 사회의 진실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 특정 보수언론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주 입장을 변화시킨다.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책회의 측은 '이명박 퇴진' 구호를 내걸고 있다.

"글쎄, 대책회의는 대책회의고, 우리는 우리다.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도 사랑한다. 그가 국민적 기대가 부응하는 바를 실현하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여기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싶다. 마지막 질문은, 내가 요즘 들어 안면을 트고 가끔씩 인사를 나누는 <문화일보> 기자가 던진 질문이다. <문화일보>의 논조가 깊게 스며든 질문이라, 나로서는 김인국 신부의 발언을 받아적는 와중에도, 그 <문화일보> 기자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언론에 소속된 기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 다음으로 주목받은 인사가 있다면, 김용철 변호사일 것이다. 사인 요청이 잇따르자 다소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를 질리도록 했던 경험이 깊게 묻어져 있다. 무엇을 묻든 즉답을 피했으며, 철저하게 원론만 이야기했다.

 

-이 자리엔 어떻게 오셨나.

"사제단의 자문 변호사가 3명이다. 그중 하나가 나(김용철 변호사)다. 사제단의 자문 변호사로서 신부님들과 함께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촛불집회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 자리에는 신부님들이 오시면서 자문 변호사로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나왔다."

 

-삼성....

"아아, 그 부분은 이야기하지 말자. 재판중인 사건인데…."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다. 민감한 부분이라 섣불리 말할 수 없었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가까이에서 보고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본 김용철 변호사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수많은 언론 인터뷰를 보면서 단련된 흔적이 역력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소개했을 때의 김용철 변호사의 반응도 재미있다.

 

"어? 거기, 아무나 다 기자잖아?"

 

웃으면서 시도했던 내 반박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목걸이로 차고 있던 명함을 들어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에이, 이 명함은 아무나 안줘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명함은, '이달의 뉴스게릴라'로 선정되거나 3개월간 메인노출기사 5개 이상 작성한 시민기자가 발급대상이다.

 

'사제단'의 등장, 본질을 일깨우다

 

촛불시위가 애초에 내건 명분은 '비폭력'이었다. 하지만, 이야기하자면 2박 3일은 충분히 소비될 그 과정들을 통해 폭력이 오가면서 전경과 시민들이 피를 흘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제단의 등장과 간곡한 호소 덕분에 '본질'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제단의 등장으로써, 촛불시위 참가자들은 명분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가톨릭 신부'라는 신분도 정부가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특이점이 있다. 사제단의 등장은 시위참가자들에게 마음의 위안과 함께 그런 보호벽을 제공해줬다.

 

'본질'의 싸움이다. 사제단의 등장으로써, "촛불시위 진압을 공세적으로 바꿀 것"이라던 경찰의 방침은 상당부분 명분을 잃었다. 현장에서만 봐도, 시청 앞 광장을 빈틈없이 포위했던 전경버스도 두세대 가량만 남겨두고 철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시민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질긴 놈이 이기는 것"이라고. 그렇다. 나는 거기에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질기게 명분을 지키는 놈이 이기는 것"이다. 경찰은 이미 1980년대식 진압방식을 동원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천명한 것 자체에서 명분싸움에서 지고 있다.

 

그런 진압으로 사람들이 기가 죽어 시위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그렇게 대치하고도 아직도 본질을 모르는 것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따름이다. '본질'을 다시 깨달은 촛불시위, 또다른 국면을 맞이할 7월은 그렇게 새로 다가왔다.

 

[알림] 사진 및 동영상은 집에서 곧장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광화문 인근 PC방인데, 오류가 계속 뜨는군요.



출처 : http://blog.daum.net/ctzxp/11973567

by 태방 2008. 7. 1. 08:49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080619110916429&cp=yonhap

한나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세비반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중이라는 연합뉴스 기사가 있네요.
명분상 좋은 일입니다. 일 하지 않았으니 국민의 세금으로 받는 세비를 받지 않겠다라..
하지만 국회 돌아가는 실정을 알게 되면 세비반납이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회의원들은 의원회관에 수명의 보좌관과 비서관을 두고 있으며, 한달간 다양한 의원활동을 합니다.
국회에 등원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가장 본연의 임무이기는 하지만, 국회에 있는 시간보다는
국회 밖에서의 일이 더 많은것도 사실이구요
(어떤 국회의원은 보통 6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을 하는데 하루종일 국회에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런 활동을 위해서는 일정양의 자금확보는 필수입니다.
식비며, 차량유지비며, 의원 사무실 유지비와 직원들의 임금(국회에 둘수있는 보좌관 비서관의 수는
실제 국회의원의 업무를 보는데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이며, 그 외의 직원들은 세비로 임금을 충당합니다)
그 많은 활동의 자금을 많은 의원들이 세비에서 충당하고 있으며, 사실상 타수입이 없는 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직접 생활비로 갖게 되는 돈이 그리 많지는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의원들은 대부분(정말 대부분이!) 개인자산도 많고, 세비 없이 충분히 생활이 가능한 형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비를 반납하더라도 의원활동은 물론, 가족의 생활비 충당에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선진한국당 등 야당의 의원들은 많은 수가 세비를 통해
생활비와 의원활동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세비가 없다면 당장 의원활동에 지장이 오는것이 당연합니다.
장외투쟁을 하고 있고, 현재 국회에 등원을 하지 않더라도, 국회 내에서의 입법업무를 제외한
다른 업무를 이미 수행하고 있고, 기본적인 국회의원활동유지 및 생활비가 필요한 야당의원들에게
한나라당의원들은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 세비를 반납하겠다고 야권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비 반납을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 개선 및 장외투쟁의 명분을 없애겠다는 의도로 보이는데
이러한 제 생각이 너무 오바스러운가요?
by 태방 2008. 6. 19. 14:50

훌륭한 경찰관이 되고 싶다는 구름이에게

 

■ <검은 세력>의 형성

 

구름아

낼 모레면 쉰 줄로 접어드는 내가 왜 굳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 뒤에 숨은 아주 악랄한 집단과 싸워야 한다니까

넌 이명박 정권 뒤에 숨은 그 사악한 세력의 실체를 알고 싶다고 그랬지.

왜 촛불시위대와 경찰이 티격태격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넌 알고 싶다고 그랬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그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자.

긴 이야기가 될 거란다.

하지만 마음을 충분히 가다듬고 쓴 사람도 좀 생각해서 부디 끝까지 읽어주렴.

이들을 편의상 <검은 세력>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들의 뿌리를 찾자면 저 1910년 우리가 왜놈한테 주권을 빼앗기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단다.

 

■ <검은 세력>의 성장

 

안중근 의사가 주권 침탈 원흉 이등박문 가슴에 총알을 박아 꺼꾸러뜨리고,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한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군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여고생이던 유관순 열사가 끝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지가 갈가리 토막나 죽어가는가 하면,

이름 없는 독립군 병사가 광야에서 까마귀 늑대 밥으로 무수히 널브러져 죽어갈 때란다.

 

구름아

이때부터 이네 <검은 세력>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왜놈들한테 빌붙기 시작한단다.

처음엔 구멍가게 수준이었지.

하지만 이 구멍가게가 성장해 오늘의 삼성이 되고 현대가 되는 거란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냐고? 아직 21살이라 잘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럴 테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건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을 테니깐.

오늘날 글로벌 그룹을 지향하는 세계 5위 안에 드는 재벌인 삼성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구멍가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하지만 거대한 몸집인 격투기 선수 최홍만도 갓 태어났을 무렵에 그저 주먹만한 한 줌 어린애에 불과했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구름아

자 그럼 네가 이 구멍가게 쥔장이라고 하자.

또 당시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전체를 <민족세력 + 어중간한 세력 + 반민족세력>이란 도식으로 나누어 보기로 하자.

자 너라면 구멍가게를 커다랗게 키우기 위해 누구를 주력 소비자로 택할 테냐?

물론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진 두 번 째 <어중간한 세력>이어야 할 테지.

자 그럼 다음 이네 <어중간한 세력>에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 누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해야 유리할까?

 

■ <검은 세력>의 자본력과 권력의 결탁

 

구름아

나도 작긴 하지만 10년이 넘어라 사업을 하는 사람인 건 너도 익히 알지?

그 무렵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의 관리를 받을 때였단다.

정부에서 10여년 넘게 가격을 묶어 놓고 그 가격만 받아라 하는 상품이 있었거든.

근데 그 가격만 받아서는 건물 임대료 관리비는 물론 직원 월급도 못 주는 형편이었어.

어쩔 수 없이 그 이상의 가격을 받고 상품을 팔밖에 방법이 없었어.

그래 때마다 나오는 감사에 때마다 걸리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지.

뭐 그래야 일 년에 한번 맞는 소나기니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넘어가곤 했으니깐.

 

구름아 이 정도라면 이제 얼핏 눈치 챘을까?

 

한번은 감사 받은 지 얼마 안 지나 또 감사반이 닥쳤길래 버럭 소리를 쳤단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웬 놈의 감사는 맨마다 나오냐? 너들 맘대로 해라.

욱한 마음에 이러고 장부를 감사반 앞에 툭 던져놓고 밖으로 나와 버렸단다.

그래서 결과가 어땠냐구?

하하하 영업정지 45일이었단다. 영업장 폐쇄 아닌 것에 위안을 삼으라고 하더구나.

그래 결김에 다시 대들었지. 차라리 속 시원하게 영업장을 폐쇄하라고.

그러면 영업장 신고 다시 내서 내일부터라도 다시 영업하겠다고. 그랬더니 왈,

―그냥 영업은 해라. 다만 하루 정도 우리가 연락하고 확인 나올 테니 그 날 사진 찍을 한 몇 분 동안만 문 닫고 영업정지 처분장 현관에 붙여두라. 그리고 계속 영업해도 모른 척 할테니.

지들도 미안했던지 이러더구나.

 

구름아 이제 완전히 눈치를 챘겠지?

구멍가게 쥔장인 네가 네 사업을 키우려면 누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매번 오는 소나기를 가랑비나 이슬비로 바꾸는 힘은 또 무얼까?

이걸 세상에서는 정경유착이라고 부른단다.

정치 권력과 상업 자본의 결탁이라 할 수 있겠지.

너도 이제 돈을 만져보면 익히 알겠지만

사람이라는 게 돈을 벌고자 할 때는 소비자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거고

그렇게 번 돈을 쓸 때는 돈 받을 사람 앞에서 목에 한사코 힘주고 당당히 쓰는 법이란다.

 

■ <검은 세력>의 강고한 고착화

 

구름아

이렇듯 구멍가게 쥔장의 돈을 받아는 관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돈을 주는 구멍가게 쥔장의 목소리는 날로 커질밖에 없는 거란다.

오간 돈의 액수가 크면 클수록 준 사람이 설령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받은 사람은 요구대로 들어줄밖에 딴 도리가 없는 거란다,

이렇듯 상황의 역전이 일어날 때 온갖 검은 이권과 부정을 저지를 수 있고

이래야 빠른 속도로 가게가 회사로, 회사가 그룹으로 또 커가는 거란다.

이네의 이런 학습 효과는 향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50여년을 이어이어 간단다.

이 이야기는 뒤에 또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물론 모든 사업자가 이랬다는 건 아니다.

게중에는 민족주의에 기대 정직과 품질로 빼어난 성과를 이룬 사람도 적지 않지만,

이 이야기 또한 오늘의 주제에서는 벗어나는 거니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 <검은 세력>의 몸집 불리기 1

 

구름아

앞서 3·1 독립만세에 대해 잠깐 말한 거 기억 나냐?

어린 여학생부터 호호 백발까지 철철 피 뿌려 이 강토를 빨갛게 빨갛게 온통 적시고 나자

비로소 이 땅에 민주의 여린 싹이 아직 꽁꽁 언 땅을 뚫고 돋기를 시작한단다.

그 피의 대가 중 하나만 들자. 그게 무엇일까?

바로 왜놈총독부가 지레 뜨끔할 탓 비로소 우리겨레말글로 만든 신문의 창간을 허용한단다.

이 때 구멍가게 쥔장 출신 <미스터 방>이 등장한단다.

이 <미스터 방>은 작가 채만식의 동명 소설이기도 한단다.

상황이나 내용은 좀 다르지만 시대 풍자란 점에서

또 이런 부류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구나.

이 미스터 방께서 그거 돈 좀 되겠다 싶어 창간한 신문에 바로 <조선일보>란다.

이런 신문이니 차후 어떤 길을 걸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테니 그 이야기는 생략하자꾸나.

 

또 하나 구름아

이참에 민족 진영에서도 신문 창간을 요청해서 왜놈 총독의 윤허(?)를 받아 낸단다.

그렇건만 신문사 하나를 만든다는 게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란다.

무엇보다도 돈이 없으니 문제였단다. 하지만 우리 겨레가 어떤 사람들이냐?

이런 일에 눈에 불 켜고 달려들어 너나없이 지갑 여는 순박한 인정의 겨레

심지어 저 멀리 남의 나라 불행에도 차마 외면 못하고 지갑 여는 겨레가 아니겠냐?

이렇게 십시일반 창간한 신문이 <동아일보>고 설립자는 인촌 김성수란 분(?)이었다.

고려대학교까지 설립한 이 분은 나중에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부통령까지 지낸 아주 훌륭한 분(?)이셨지만,

 

근데 구름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글쎄다 이분께서 이런 일을 손수 하셨단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통쾌하게 우승을 거두었을 때

우리 겨레는 모두가 환호를 했다는 거쯤 너두 알겠지.

근데 이분 신문사 몇몇 기자분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단번에 지워버리는

그런 불경(?)을 서슴없이 저질러 온 겨레의 가슴을 아주 그렇게 시원하게 해 주고,

별 저항도 없이 스스로 잡혀가는 일이 벌어진단다

근데 글쎄 이분께서 그 용감무쌍 동아일보 기자분들을 단박 깡그리 해고해 버린단다

역시나 구멍가게 쥔장은 누구의 눈치를 보고 어떤 행동거지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너무도 똑똑하게 보여주신 이분께서

후닥닥 날름 먹어치운 이후 동아일보의 행보도 이쯤 짐작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때 삼성을 일군 구멍가게 쥔장 출신 미스터리도 이 두 분을 본받아 신문업에 진출한단다.

이 신문이 중앙일보니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 <검은 세력>의 몸집 불리기 2

 

구름아

근데 이만 구멍가게 쥔장 정도로야 아직 <검은 세력>이라고 부르기엔 좀 거창한 감이 있구나.

그럼 또 누가 있을까?

지난 총선을 한번 되돌아보자꾸나.

국회의원 선거에 어울리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뉴타운 공약이 한나라당에 싹쓸이 의석을 준거 기억나지?

이렇듯 나 지금 배고픈데 무언가 먹을 콩이나 좀 없을까 왜놈 주위를 알찐거리는

쓸개 빠진 인간이 서서히 나대기 시작을 했더란다.

그래 왜놈들은 이 인간들 중 쓸모 엔간한 자들을 뽑아 앞잡이로 쓰기 시작했더란다.

왜놈 순사 헌병 밀정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가를 눈에 불을 키고 잡아들이면서

또 면사무소 읍사무소로 들어가 왜놈 배불리기에 앞장을 서면서 이만해도 여봐라 뻐기고 다니더란다.

사실 이네야말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란다.

정작 떡은 <검은 세력>이 다 먹는 건데 떡은커녕 떨어지는 콩고물 몇 부스러기에 눈멀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시키는 대로 앞잡이 방패 노릇을 하며 짖어대고 물라면 물고

하지만 사실 이네는 별 무서울 게 없는 세력이어서 무시하여도 별 상관은 없단다.

이들을 완전히 <검은 세력>은 아니고 왜놈 도구 정도니 그냥 검은 <점박이> 정도라 부르기로 하자.

 

■ <검은 세력>의 몸집 불리기 3

 

구름아 그럼 정작 무서운 자들은 누굴까 궁금하겠구나.

이제까지 말한 <검은 세력>이야 그 실체가 확연히 보이는 편이란다.

그럼 보이지 않아 더 무서운 그들은 누군지 이 궁금증을 좀 풀어보자꾸나.

우선 구멍가게 쥔장으로 돈깨나 만지기 시작한 분들께서 제일 신경을 써서 한 일이 무얼까?

그래 맞다. 바로 자식 교육이란다. 부에 걸맞는 명예는 곧 출세가 아니겠냐?

이네는 자식이 아직 어리건 말건 아랑곳없이 어려서부터 일본어몰빵교육 시키고

앞다퉈 왜놈 나라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하더란다.

예고 지금이고 돈의 힘은 막강해서 마침내 이네 자제 중 판검사도 나오고

고위 경찰이나 공무원 고위 간부는 물론 고급 군인도 나오게 된단다.

그리고 자진해서 왜놈총독부 앞잡이가 되어 왜놈 이권 지키기에 혈안이 된단다.

왜?

왜놈의 이익이 곧 자기의 이익으로 직접 이어지니까지.

이래 이런 자들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에게는 <비적(匪賊―도적만도 못한 도적이란 뜻)> 딱지 붙이고

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엔 <빨갱이> 딱지를 붙여

패고 죽이고 패고 죽이고 이러면 곧잘 그 공으로 승진에 승진을 이룩하면서

원숭이 주제에 지가 치타인줄 모르고 타잔이나 된 양

부에 명예마저 차근차근 쌓아가더란 이야기지.

 

구름아 아직 끝이 아니란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이네는 일껏 사재를 털어 선뜻 학교를 세우기도 한단다.

물론 모든 학교가 다 이런 것은 아니란다. 게중에는 양심 세력이 세운 학교도 많다만.

근데 이 학교 이사장에 이사 비롯한 재단 거개가 족벌 체제라

혈연 지연 학연으로 교장 교사를 뽑고 일체 외부 간섭을 차단하는 담을 두른단다.

그리고 왜놈 천황을 한없이 떠받드는 황국신민 교육에 앞장을 선단다.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깎아내리고, 우리말 대신 왜놈 말을 상용하고

우리 젊은이가 징용 정신대로가 봉사를 해야 옳다고 가르쳤단다.

 

■ <검은 세력>의 생존 전략

구름아

이 보이지 않게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숨은 거대한(?) 이네를 우리는 <검은 세력>이라 부르는 거란다.

 

헌데 구름아

꽃은 피어 십일 넘게 붉지 못 한다는 말이 있는거 알지?

덜컥 해방이 닥치니 이네는 쩔쩔 매고 두려워할 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이때 미국박사 구세주 <미스터 리>가 나타나더란다.

독립군 총지휘관으로 임시정부 주석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보내 폭탄테러(?)는 물론 오사마 빈 라덴 뺨치는 활약을 보이신 김구 선생이 대통령 되면 앞날이 없다고 여겼단다.

그래서 이네 모두는 수단과 방법을 다해 이승만 구워삶기에 여념이 없었단다.

 

구름아

매 이기는 장사 없듯 돈 이기는 장사도 흔치 않은 법이거든.

이렇듯 돈 이기는 장사를 흔히 <대쪽>이라 부른단다.

하면 오늘날 진정한 <대쪽>이 있는 건지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 아닐까?

어떻든 이 냄새 구린 돈의 끝없는 지원에 힘입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고

왜놈 앞잡이 대청소는 이냥 물건너 가고 만단다.

헌데 권력을 잡긴 했지만 이네 여기서 <검은 세력>은 잠시 고민에 빠지고 만단다.

<검은 세력>의 존재 이유가 빨갱이 비적 소탕인데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으로 빨갱이는 죄 3·8 선 이북 땅으로 가버렸으니.

그러자 이네는 <비적> 출신이자 이승만에 반대하는 자들을 싸잡아

반 민주주의자로 몰고 곧 <빨갱이>로 규정해 때려 잡기 시작한단다.

머리 속에 빨간 물 쬐끔 들었다고 싸잡아 <빨갱이>로 몰다니

북한에 있는 진짜 빨갱이(?)가 보면 배를 잡고 웃을 일이지만 어쩌겠냐 구름아.

1990년대까지도 백주 대낮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버젓이 벌어졌던 일이니.

 

■ <검은 세력>의 기득권

 

구름아

이런 자들을 우리는 앞서 이른 대로 이명박 뒤에 숨은 <검은 세력>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조중동이라고도 부르는 거다.(뒤에 붙는 짜잘한 찌꺼기는 키워주는 감이 있으니 생략하자.)

뉴라이트라고도 부르는 거다.

사립학교 족벌이라고도 부르는 거다.

재벌 권력이라고도 부르는 거다.

 

박정희의 강남 택지 개발로 이들은 이미 단맛을 짭짤하게 보았다.

평당 30원에 사들인 땅을 300만원에 그것도 한 1만평을 팔았을 때 그들이 느낄 희열을,

사흘 굶어 동네 구멍가게에서 우유 하나 훔쳐도 감옥을 가는데

아무리 탈세를 하고 비자금을 몰래 만들어도 감옥조차 안 갈 때 그들이 느낄 희열을

생각해 보렴, 구름아.

난 퍽이나 끔찍하구나.

 

일 년이면 십여 차례씩 교수와 교사라는 직책을 주는 대가로 몰래 수천씩 돈을 받을 때

교복 업자 급식 업자 참고서 업자 건설 업자 교구 업자 수학여행 업자한테 수백 수천씩을 리베이트로 받을 때,

수업료 빼돌리고, 보충수업비 착복하고, 학무모한테 학교발전기금 걷어 쓱싹할 때,

어떤 누구 눈치도 살필 필요 없이 이네는 당당하게 받아 챙겼다.

이런 저런 리베이트 대가로 보유 자산을 훨씬 초과하는 은행 돈을 내 돈인 양 대출 받아

문어발 확장하면서도 큰소리만 땅땅쳤다.

 

구름아

사립학교법이라는 무언지 아냐?

사립학교 이사회를 구성할 때 학교 바깥 인사를 일정수 이상을 채워야만 하는 법이란다.

눈치 빠른 너니깐 이러면 사학 재벌은 무지하게 불편할 거라는 건 안 봐도 알겠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은 내내 이 사립학교법 저지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자마자 <학교 자율화>란 선물을 덥썩 안긴다.

이네가 얼마나 펄쩍 뛰면서 좋아했을지 알겠냐 구름아?

 

금산분리법이 무언지 알겠냐 구름아?

일정 자본금 이상을 가진 기업의 은행 설립을 막는 법이란다.

이미 우리나라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삼성이 만약 은행에 진출한다면 그 폐해가 얼마나 클지

그래서 그걸 막자는 법인데 역시나 이명박 정부 출범하자마자 금산분리 완화라는 선물을 안기더구나.

 

출자총액 제한이 뭔지도 말하고 넘어가야겠구나 구름아!

<갑>이란 회사가 <을>이란 회사에 출자를 해서 자본금을 늘린 다음 다시 <병>이란 회사에 출자를 하고

그러면 갑에 지배 자본을 투자한 재벌 총수가 나머지 회사에 투자를 안했음에도

나머지 <을>이나 <병>까지 지배를 할 수 있는 거란다.

근데 이걸 못하게 막는 게 출자 총액 제한이란다.

헌데 이명박 정부 출범하자마자 이를 완화하겠다고 아주 보란 듯이 선언을 하더구나.

 

■ <검은 세력>이 잃어버린 10년

 

구름아, 이네가 말한 잃어버린 10년이 바로 이런 거란다.

 

구름아

이제 가난한 사람이 어째서 늘 가난한지 알겠니?

노력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생각이 불건전해서 그렇다고 왜놈 총독부는 우리를 그렇게 닦달했단다.

그러니 문명국인 지네가 야만국인 우리 겨레를 가르쳐야 한다고.

이네 또한 이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입버릇처럼 말하는구나.

그래서 새마을 운동이 필요하다고, 삼청교육대가 필요하다고 입에 게거품을 무는구나 아주.

과연 그 시절 우리가 게을러서 못 살았을까?

또는 생각에 빨간 물이 들어서 못 살았을까?

돈이 돈을 벌기 때문 아닐까?

그렇지 않니, 구름아? 땀과 노력이 돈을 버는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구름아

그렇다고 이네가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란다.

 

4·19 혁명이 와 또 위기를 맞건만 이네는 박정희란 구원투수를 등판시킨다.

80년 서울의 봄이 와 또 위기를 맞건만 이네는 광주를 피로 짓밟고 전두환을 투입한다.

87년 6월 항쟁으로 또한번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자 이네는 당시 민주화 진영을 김대중 김영삼 진영으로 분열을 유도한다.

이 작전이 주효해 노태우가 대통령 당선을 먹자 이네는 안도한다.

이어 수십년 민주화 운동가였던 김영삼마저 포섭해 변절하도록해 5년을 연장한다.

 

하지만 구름아

이어 들어선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네는 좌절한다.

이에 작심하고 재산 불리기에 나서는 거란다.

농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농지를 농민으로 위장 전입해서 사들이고

권력의 단맛을 아쉬워하며 몫 좋은 건물 아파트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그럴 때 노무현 정부가 종합부동산 보유세를 만드는 거란다.

일정액 이상 고액 주택을 보유한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법이지.

또 과다한 토지 보유, 과다한 건물 보유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조치까지.

게다가 일제 잔재까지 대청소하겠다고 진상조사위를 만들었지.

여기에 일제 앞잡이 인명사전까지 만들었을 정도니 어마 뜨거울밖에.

제 조상의 부끄러운 죄악이 만천하에 드러날세라

그러니 뉴라이트가 나서서 역사책을 새로 쓴답시고 일제시대가 문화혜택을 듬뿍 입은 축복의 시대라는 궤변에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 매도하면서까지 자기 변명에 급급했지.

그러면서 이 모두 문제를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란 권력 탈환뿐이란데 인식을 함께 했고 반드시 권력을 되찾아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을밖에

이런 까닭에 이네가 똘똘 뭉치게 되는 거란다.

조중동을 동원에 여론을 조작 선동하고, 경제 살리기로 현혹하고

뉴타운 개발로 눈속임하고 아주 총력을 기울여 되찾은 권력이 이 정권이란다.

 

■ 내가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

 

구름아

이제 내가 왜 촛불을 들어야 하는지 알겠니?

50여년 넘게 끌어온 이 싸움을 이제는 아주 끝장을 내고 싶은 거란다.

다시는 이네가 준동할 수 없도록 박멸을 해 버려야 너희가 또 내 후손이 길이 평안하지 않겠냐?

 

구름아

좋은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그것도 알려 주마.

지난 촛불 시위 때 경찰이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까대고 곤봉으로 갈기고 물대포를 쏘고 그랬더니

매 맞은 전경도 있다며 맞불을 놓은 기억나지?

폭력 시위대(?)한테 맞았다고 동영상도 여럿 올라왔지?

봐라 시위대도 나쁘다. 경찰만 욕하지 마라. 아주 이렇게 대놓고 말하더구나.

 

하지만 구름아

여기서 만약 경찰이 방패도 군홧발도 곤봉도 물대포도 사용 안 했더라면 어땠을까?

촛불 든 시위대에 힘없이 밀려서 미는 대로 애매하게 엎어지고 다치고 그랬다면

또 일부 사람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경찰이 일방으로 맞기만 했다면

그러고도 물대포 한방 안 쏘고 평화 시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만 했더라면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 그렇게 많은 촛불이 어찌 모일 수 있었겠니?

87년 6월 항쟁도 그랬고 80년 광주에서도

경찰이 시위대가 휘두른 폭력에 그저 막고 버티기만 했다면

과연 우리가 그 무렵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이게 네가 말한 좋은 경찰에 대한 나의 답이란다.

 

21살 구름아

긴 글 읽느라 수고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더 많이 남은 너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기껏 촛불을 드는 일이라니 무척 부끄럽구나.

제발 부탁한다 구름아,

투표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운 이번 일 절대로 잊지 말아 다오.

너희 세대에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널 굳게 믿는다, 구름아.

<끝>

by 태방 2008. 6. 18. 15:43
http://blog.naver.com/nogari9/100051437443

“낚시 달인? 배스와 쏘가리 구분도 못해”

한겨레 | 기사입력 2008.06.03 15:51 | 최종수정 2008.06.03 16:21

50대 남성, 대전지역 인기기사


[한겨레] 작가 이외수의 '뼈 있는 한마디'
이외수 "그걸 알고도 월척 기다리며 매운탕 준비"
"도덕이 경제보다 더 중요…촛불시위 가슴 뭉클"


작가 이외수(62·사진)씨는 최근 호를 하나 얻었다. '격외옹'(格外翁). 세상 격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늙은이란 뜻이다. 류근 시인이 지어줬다는데 무척 맘에 든다고 했다. 5월 끝자락,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자택에서 만난 그는 지난해 12월17일 40년 넘게 하루 여덟 갑까지 피우던 담배를 끊은 사연으로 말문을 텄다.

"참 걸판지게 살았는데, 대표작이 뭐냐 누가 물으면 마땅히 답할 게 없는 거예요. 담배를 끊고 몸을 좀 지켜야겠다, 그래서 끊었는데 100일 뒤 금단현상이 왔어요. 호흡이 가빠지고 설사하면서 발작 가까운 증세가 왔어요. 의사가 왕진 와 보더니 패혈증세라며 놔두면 죽는다고 해요. 얼마 전 퇴원했어요."

  그는 어떤 작품을 더 쓰고 싶냐는 물음에 "읽고 나면 오래도록 행복해지는 작품, 행복한 여운이 남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가슴 아린 작품들을 많이 썼어요. 아마 살아온 환경 탓이 크겠죠. 근데 이젠 진짜 좋은 예술 작품을 쓰고 싶어요. 행복을 주는 그런 것 …."

  "예술이 이젠 인간 사회의 진보에 기여해야 할 때"
   그는 "인간이 진화가 가장 더딘 것 같다"며 "새나 나무나 산이나 주변의 자연은 평화로운데 오직 인간만은 탐욕과 부조리 탓에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예술이 이젠 인간 사회의 진보에 기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며 "자연과 어울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왜 못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작가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낚시의 달인처럼 행세하던 놈이 막상 강에 나가니까 배스와 쏘가리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어떤 멍청이들은 그놈이 월척을 낚아 올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한 채 매운탕을 끓일 준비를 한다 …."

  무슨 의도가 있는지 궁금했다. "의도는 무슨 …. 요즘 진실을 보는 눈이 많이 실명된 것 같아요. 도덕을 무시해도 경제만 살리면 되는 것인가? 깊이 새겨보지 않고 주사위만 던지면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안론'(四眼論)을 꺼냈다. "사람들은 육안·뇌안·심안·영안 이렇게 네 눈이 있어요. 그런데 육안과 뇌안만 갖고 보니까 진실을 제대로 못 보고 왜곡하게 되지요.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크게 떠야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데 …."

  요즘 어린 학생들까지 촛불시위에 나서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인터넷 중계되는 거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그런데 그건 촛불문화제 같은 것 아닌가요? 촛불시위는 투쟁 방식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거든요. 민의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는 게 지금 정부가 할 일이지요. '정선아리랑'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진흙 속 저 연꽃 곱기도 하지~' 세상 탓 많이들 하지만 스스로 양심을 간직하면 연꽃처럼 맑을 수 있거든요. 양심과 도덕을 회복하는 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선거 때는 경제가 도덕보다 더 중요했을지 몰라도 이젠 도덕이 경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다리 부러진 제비에 공감한 흥부처럼 정치도 그렇게"
   1972년 < 견습 어린이들 > 로 등단한 이래 다작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까닭에 그의 집에는 요즘도 한 달이면 250명 정도의 독자들이 다녀간다. 마침 화천군에서 주변 일대를 '감성마을'로 지정해 요즘 공사도 한창이다. "흥부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의 아픔에 공감을 했던 거고, 놀부는 성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렸으니 공감이 될 리 없었던 거죠. 제비 따로 놀부 따로였던 셈입니다. 정치도 국민 처지에서 공감하고 일체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의 글을 빌려 요즘 심경을 물었다. "글은 외로워야 더 잘 써집니다. 우주의 주체인 인간이 어디까지 더 외로워야 하나, 그런 물음을 갖게 됩니다. 깨달음과 수행을 겸비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거지요. 속세와 인연을 끊으면서, 스스로 존재를 지워가는 것, 산중으로 산중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상처가 하나 생길 때마다 꽃 한송이가 피어난다'는 글귀를 빌어 연예담도 살짝 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학연·지연 공화국에 살고 있지 않나요? 지난해 떠나신 선친이 군인이셔서 하도 옮겨 다녀 내겐 지연도 없고, 대학도 돈이 없어 한 학기 다니고 돈 벌려고 또 쉬고 하다 보니 학연도 없어요. 여성들이 좋은 학교 나오고 집안 좋고, 잘 생기고 키 크고 그런 남자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난 해당사항이 전무이니 연애에선 실패 아니면 짝사랑이었죠."

  그는 독특한 머리스타일로도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대학 1학년부터 머리를 길렀어요. 유신 때 머리 깎이기도 했는데, 몇 년 전부터 머리를 따니까 성가시던 게 가시고 조금 깔끔해 보여요. 집사람이 빗어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물을 마시려는데 새가 그려진 머그잔이 눈에 들어왔다. 선친이 홍대 미대를 보내주지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의 그림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글귀도 함께 새겨져 있다. '기쁜 일만 그대에게.' 이외수답다.화천/글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동영상 은지희 피디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뢰도 1위' 믿을 수 있는 언론 < 한겨레 > 구독신청 하기
<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by 태방 2008. 6. 3. 20:09
http://blog.naver.com/nogari9/100049316413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꺾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성적증명서를 떼보면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은 나를 '민주투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사와 검사, TV 아나운서와정부당국의 '나으리들'은 나를 일컬어 '좌경용공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붙여준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자리 없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실업자라고 나를 비난한다. 그렇다.나는 직장이 없다. 하지만 직업은 있다. 나는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 번역을 하거나 수필을 쓰고, 어떤 때는 드라마 대본이나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의 직업을 구태여 말하자면 '자유기고가'라 할 수 있다.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책도 하나 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나는 감옥에 두 번 갔다 온 전과자이지만 예비역 육군 병장이기도 하다.폭력전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폭력배는 아니다. 한번도 남을 때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계엄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적도 있지만 그 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군대생활 32개월 동안에도 영창 한번 간 일이 없는 모범 사병이었다.
 
나는별로 잘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 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 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 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나라. 이런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이런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감옥에 잡아 가두려고 한다. 계엄령 위반이니 폭력죄니 하는 내 전과는 그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 별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6월에 수백만 국민이 했던 일들에서 보듯 아주 많은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내가 나를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이렇게 살려는 뜻을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나름대로의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이런 생활에서 찾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나가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이듯이 나도 또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나라는 인간의'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단지, 지난 십 수  년간이 사회가 나와 이웃에게 가한 억압에 맞서싸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생활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출세욕을 품게 한 '가난뱅이 의식'
 
나는 2남 4녀 중의 차남이자 다섯째이다. 태어나서 10년은 경주에서, 고교 졸업까지 10년은 대구에서 자랐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그 분은 비록 "가슴에 달 금빛 훈장도타고 갈 황금 마차도 없는" 평교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먹였고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나는 '가난뱅이'였던 적이 없다. 밥이 없어서 굶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나는 주관적으로 가난을 몹시 심각하게 경험했다.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다. 미술시간이면 두꺼운스케치북과 포스터칼라를 꺼내놓은 친구들이 낱장 켄트지를 꺼내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조심스러웠고 외풍 센 먼지투성이 우리 집은 나로 하여금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 소년기의 대부분을어두움으로 뒤덮었다.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두 살 간격으로 늘어선 6남매. 내가 중 3일 때 큰 누님과 형은 더구나 사립대학을다니고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가계였다. 빚이 늘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전부터 집에 달린 점포에 잡화상을 차렸다. 매일 새벽 시내의 큰 시장에 나가서 생선과 야채를 받아오는 중노동 때문에 심장이 약한어머니는 늘 어딘가 편찮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고 오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고 그 헌신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가난과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화가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보고서 모른 척 지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그 뒤 며칠 동안 몹시 번민하고 자학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가난의 이유를 몰랐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왜 시장아줌마가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새 빚걱정에 한숨을 쉬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대구에서 경주로 학교를 옮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이확실할 분이었다.
 
나는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한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보건소에 가서 무료로 주는 알약을 타오곤 했다. 어머니가 그 알약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경주에서 토요일이면 오던 아버지가 가끔 일직 때문에 못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면 나는 밑반찬을 가지고 경주에 갔다. 아들에게 더운 밥을 먹이려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의문을 품었다. "하숙 대신 자취를 해서 도대체 얼마나 절약될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우는 적이 많았다.


그 때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하루빨리 법관이 되어야지"
 
나는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판사'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 가장 빨리 출세해서 부모님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장한 각오로 '판사'라고 대답하면 백부님이나 당숙들은 매우 기꺼워하였다. 하지만내 부모님께서 그런 대답을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누이들이 은근히 그런 결심을 부추겼을 분이다. 나는 소위'출세'라는 것을 하기 위해 '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사회적 욕구였다.



사회적 부조리의 첫경험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 같다. 자유니 정의니 하는 빛나는단어들을 책에서 배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단어들 때문에 가슴 설레거나 잠 못 이룬 적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될때까지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이제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저 신기하게 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출범했지만,그것 역시 다음해 국민윤리 교과서에 장황하게 서술된 '한국적 민주주의' 만큼이나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씨가 간첩으로 나오는 반공드라마를 들으면서도나는 일간신문에 기둥 만한 활자로 박혀 나오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학생회장 선거가 없어지고학도호국단이란 것이 생겼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던 우리 집에 아침마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정치권력의 언론자유 탄압에 비분강개하지는 않았다. 그건 드물게 재미있는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다. 정치경제교과서에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설명한 내용과 유신헌법 조문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었지만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것을 몽땅외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잡혀간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긴급조치의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75년 당시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하여 김상진이라는 서울대학생이 할복자결한 일까지 있었지만 내가긴급조치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등생'이었다. 중학교때보다는 성적이 훨씬 향상되어 선생님들로부터 일류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수한 고교평준화 1기생'이었던 것이다. 교실구석에서 박정희와 모모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속살거리거나,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사회선생님을당황하게 하는 친구들을 나는 경멸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학생이라면 학교공부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회라는 것'에 대해,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 상황이 나에게 닥쳐왔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처럼 닥쳐왔다.
 
나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받은 봉급을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 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잡았다. 어머니가 장사 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 준 아버지, 여섯 살 때부터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소외당한다는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 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오도된 반란 : 냉소주의
 
아버지의 봉급액수를 알게 된 순간 이후, 나는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지당하신 말씀'들 속에서 거짓의 냄새를 가려낼 수 있게되었다.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 사회교과서 전체를 지배한이런 조화론적 세계관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일뿐이었다.


그것을 사회적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느낀 가난에 대해 부모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근면하고 정직하며 힘껏 일하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부모님이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장래의희망을 법관으로 잡은 데 대한 회의가 싹텄다. 유신시대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타락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관을진심으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 권력에 가까이 있고 잘만 하면 한 재산 모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러워할뿐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나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학교생활도완전히 엉망이었다. 중고등학생 3천 명이 ㄱ자 4층 하나에 몽땅 수용된 학교. 도서실 좌석이 1백 석 남짓하고 그저 교사와학생들을 족쳐서 명문대학에 많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학교운영. 교사의 평균연령이 30세를 겨우 넘고, 서울의 강남지역에여학교를 짓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두운 교실에 형광들을 더 달아달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묵살하는 재단 측의 횡포.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러하듯 학생들의 인격 함양에 신경을 쓰기엔 선생님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었고, 오직 명문대학 진학에만 눈이 팔린 우등생을 만족시키기엔 젊은 선생님들의 경륜이 부족했다.


나는 학교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엔 아무 책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꺼내놓고 혼자 공부하거나 잠을 잤다. 방학중의 보충수업에는 한시간도 참석하지 않았고 예비고사가 끝난 후 두 달간은 학교에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성이 비뚤어진 우등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어느 정도는 비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과목당 몇 만원씩 내고학원강사들에게 그룹지도를 받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 대신 가게에 앉아 영어 참고서를 읽어야 했고,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수학때문에 고민하다가 최후수단으로 수학정석과 해법수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버려야 했다.


나는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는 척척 풀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문제를 푸는 선생님의 강의를 꼬박꼬박 듣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비뚤어진 우등생 쪽으로 끊임없이몰아댔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릎 꿇고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나의 정신세계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지나쳤다.


각박한 입시교육이 쳇바퀴 속에서 선생님도 나도 혹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법관이 된다는 데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흥미나 적성으로 보자면 역사학과 언어학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하지만 그건 별로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았다. 가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루 빨리 그것을벗어나려면 법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선생님도 한숨만 내쉴 뿐 이래라 저래라 권유하지 않았다. 나는괴로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열쇠를 찾아낸 후 고민을 덮어버렸다. 그 열쇠는바로 냉소주의였다.
 
세상은 어차피 불합리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다. 꼭 논리적으로 타당한 행동만 할 수는없다. 불합리해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지 않은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뒤로는 개수작해서 돈 벌어도 남 보기에 정승같이 쓰면 칭찬 받는다. 졸업식날까지는 술 담배하면 안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그때부턴 제 마음대로 아닌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해도 합격하면 영웅대접 받지만, 선생님 말씀꼬박꼬박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서 떨어지면 병신 소리 듣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저렇게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 세상에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란없는 거야.


정 역사학이 하고 싶으면 법관 하면서도 할 수 있을 꺼야.
 
나는 사회적으로용인되는 관습이나 규범을 진리 혹은 가치와 혼동했다. 겨우 열 아홉 살 촌뜨기 주제에 마치 인생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생각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교양서적도 읽지 않고 교과서 참고서만 팠으니 사고의 폭이란 것이벼룩의 간만큼 밖에 안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썼다. 법대와 경영대,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몽땅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법대를 지망한 나는 사회계열에 원서를 낸 것이다. 누구와도상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씀이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제안을하였다.


영어과를 가서 영어를 능통하게 쓸 수있게 된 후 다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동양사람은 서양을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만해서 동양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동양이란 고작 인도와 일본뿐이다. 그러고서 다 아는것처럼 만용을 부린다. 따라서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동양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선 서양어와 서양철학을전공한 후 다시 동양철학을 연구해서 훌륭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란 것이 아버지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속으로웃었다. "아버님, 그 많은 공부할 동안 제 학비는 누가 댑니까? 돈은 언제 벌어 부모님 편안히 모시구요? 아버님은 자식들의생각을 너무 모르십니다. 왜 자식 덕에 노후에 편안히 사실 생각은 안하십니까? 아버진 너무 이상주의자세요. 현실은 냉혹하지않습니까? 전 별로 판사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판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다음날 학교에나가 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무엇인가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슴 설레야 할 그 열 아홉의 나이에 나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나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고, 화랑 관창과 김유신의 생애를 들었으며, 어버지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지당하신 말씀'에 대한 정신적 반란의 싹을 틔웠다.


하지만 내 정신의 텃밭이 너무나 황폐하고, 입시공부라는 환경이 너무나 메말랐던 탓으로 그저항의 싹에서 돋아난 것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의 가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 대학 신입생 1년간은 사실상고등학교 4학년의 의미 밖에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학생활의 첫해 : 실망과 환멸의 시기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빡빡한 입시공부의 지옥에서 그야말로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대학생활" 속으로 내던져졌다. 남들처럼 나도대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학은 상아탑이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입시지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은 지성을 가둬놓는하나의 정신적인 감옥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귀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중년의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서 나는 대학이 풍기는감옥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학문은 현실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보면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학문인가 아니면 부조리와의 싸움인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부조리와의 싸움이라고 하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게 무서워 학문 쪽을택하려니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해서는 왜 안될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데모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그 말이야!"
 
좀 짜증 섞인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도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학에 다녀보지를 않아서요. 앞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면 그저 학문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되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호통과 훈계를 듣고 나서 나는 면접시험장을 나왔다. 같이입학하는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걱정을 해 주었다. 나도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실망이 그보다 훨씬 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질문을 한단 말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고 독립된 인격체인데,데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나 토론은 몰라도 하겠냐 말겠냐를 그렇게 다그치다니. 지성인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날의 실망과 회의는 다가올 숱한 환멸의 날들에 대한 하나의 암시오, 예고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그 숱한 의문들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며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캠퍼스잔디밭에서든 단지 몇 명이 모여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난해하고 심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것과는 별개였다.
 
경제학개론강의는 미적분 강의의 연장선이었다. 제한된 액수와 화폐를 가진 소비자가 그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소비지출을하는가. 일정액의 자본을 가진 생산자가 일정한 물가와 임금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장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떻게 자본과 노동을결합하는가? 경제학 교수는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방정식과 기하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가? 어째서 아무런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평생 어마어마한 소비를 하며 호의호식하는데 하루 10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죽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에속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게는 경제학이 매우 신비롭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게느껴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의주장을 다루었지만, 정치학 교수는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를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서 몇 년 씩 징역을 살리게 하는 긴급조치. 국민의 대표인국회의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인 이상한 현실. 그것을 연구하는것,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마저도 엄격히 금지된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정치학강의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철학개론 교수는 칸트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가르쳤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1978년 대한민국 청년학도가 칸트를 연구해야 하는지,칸트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빛과 희망을 주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른 이론들은 '난삽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의 강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골라잡기와 단답형 주관식문제를 풀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해야 했지만, 대학에서는 논문식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교수님의 강의와 교과서의 핵심적인 대목을한두 페이지에 걸쳐 몽땅 암기해야 했다. 차이는 그런 정도였다.
 
하나의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자유로운질문과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지닌 교과서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했다. 지금, 그리고이 땅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고뇌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는 모든 강의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룬 주장은 이미 학문이나 과학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라면 메모 한 장 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었다. 교정 곳곳에서사복형사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학생들을 감시했고, 기숙사에서 내려오는 언덕배기에는 사시사철 무장전경을 태운 닭장차가 주둔해있었다. 데모를 한다든가 이념서클에 들면 틀림없이 처벌을 당한다는 '무서운 소문'들이 신입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유신시대의 대학에는 자유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즐기고 학점을 잘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빈부격차의 원인을 연구하며, 남북통일의 방도에 대해 토론하고, 왜 술 먹고 연애 하고 학점 따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되는가를주장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단 한 뼘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새로운 형태의, 입시공부와는다른 성격의 사회적 억압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햇다. 대학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 진학은'법관'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공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유학, 대학생활이라는 신천지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법관이란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법관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타락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위해 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의 싸움 가운데몸을 던질 것인가? 나는 대학에서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선택,성인으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는 처음 직면하는 이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생활의 첫해를 다 바쳐야 했다.



절망적인 선택 : 달걀로 바위치기
 
나는 매우 냉소적인 신입생이었다.


흔히 이념서클이라 일컬어지는 학회(學會)에 가입하여 역사와 철학,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원인에 대해 눈뜨게 되고 박정희 유신정권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지만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판사가 되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결국 나는 행동할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 자체에 대한 냉소 외에는 달리 행동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유신독재는 철옹성 같아 보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할 것이고, 그가 죽으면 후계자가 또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몇백 명이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본들 신문에 한줄 보도되지도 않고 지나간다. 돌멩이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싸워도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더욱 냉소주의를 부추겼다.
 
학교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학회에서 하는 공부는 매우 흥미로왔다. 매스컴에서는 '지하대학'이라는 이상스런 명칭을 붙여주었지만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모여 일고 책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이 끝난 후 봉천동의 후미진막걸리집에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다. 매월 한 번씩은 야외로 나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했다.
 
여름과겨울의 방학에는 열흘씩 농촌 활동을 했다.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폭 넒은 이해, 논리적인 사고와발표력 등 지성인의 기본 소양을 쌓은 것은 현대식 건물과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이 있는 관악 캠퍼스가 아니라 음습한 선배의자취방과 봉천동의 쓰러져가는 막걸리집에서였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 수없었다. 여하튼 행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1학기 여름방학에 구로공단의 한 야학선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1년반의 야학활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리면 16세, 많아야 23세 사이의 여성 노동자들. 대개 전라도에서호남선·전라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공단으로 흘러 들어온 농민의 딸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에 2만 5천 원남짓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 원, 하숙비가 보통 3만 5천 원, 내가 살던 학교 기숙사의 한달 식비가 2만 1천 원, 하루 두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고등학생에게 영어·수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내가 매월 6만 원을 벌 때그들은 매주 60시간 이상 노동해서 2만 5천 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으로 먹고 입고 방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부모님의 약값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고 살았다.
 
한 달 용돈을 5백 원밖에 쓰지 않는 또순이도 있었다. 국민학교를중퇴하거나 겨우 졸업한 그들에게 국민학교 산수를 가르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밥을 굶은 적도, 내 힘으로벌어먹어야 했던 일도, 셋방살이 설움을 겪은 일도 없는 내가 스스로 가난이 싫어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다니 나는 얼마나 사치스런인간인가? 1백 원짜리 크림빵 하나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세금을 이들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국가의 녹이라는 형식으로 그세금을 얻어서 살아가는 직업을 단지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목표로 삼다니, 나는 얼마나 염치없는 자인가?


가난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이 사실은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없이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너무나 편한' 기숙사를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수없이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네번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세워졌고 단지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친대가로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교도소 담벼락 안에서 그 싱싱한 젊음을 바쳐야 했다.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감싸고 높이 좌정한판사들은 그들 순결한 젊음 위에 죄인의 너울을 뒤집어 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년 대학입시 수석합격자의 소감을 들어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어 사회정의를실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본 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억압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들을 짓밟는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이 유신체제 하에서 판사가 될 경우, 만인 후배들이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저 판사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징역 3년 4년을 선고해야 할까? 아니면무죄를 선고하고 쫓겨나야 할까? 쫓겨나려면 애초에 무엇하러 판사가 된다는 말인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고민했다.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법대에 진학하여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 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오후 2시까지 온통 고민에 휩싸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닥쳐왔을 때 나는 법대를 썼다가 지워버리고 경제학과를 써넣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몸은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경제학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취업이 순조롭기 때문에 집에다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날, 5년간이나 간직했던 법관의 꿈을 털어버리면서 나는 그만큼의 세월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했던 냉소주의와 결별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나오며 나는 가슴이 후련해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시에는 학교안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유행가를 크게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경찰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습의골방을 벗어나 행동의 광장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가슴속의 먹구름이 말짱하게 걷히지는 않았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불의와 투쟁하지 않고서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그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정치적 행동은 하나의 도덕적 결단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일 수 밖에 없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야학과 농촌활동, 학회활동과 학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행동했다. 시위대의 선봉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강의실 복도의 소화전을 열어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저 흉악한 유신체제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 해산되고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 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 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달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지역 민주노조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 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 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고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by 태방 2008. 4. 2. 09:54
http://blog.naver.com/nogari9/100045588806

"사형? 교화가 귀찮아 죽이는 것 아닌가"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씨.
ⓒ 김대홍
"국민 60~70%가 사형제를 반대해서 실시할 수 없다구요? 그런 논리라면 지금 인권 관련 법 중에서 법제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 생각이 충분히 성숙해서 제도화할 수 있는 법이 있고, 먼저 법을 만들어서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법이 있습니다. 인권법이 그렇다고 봅니다. 유럽에서 뒤늦게 사형제를 폐지한 프랑스도 당시 국민 66%가 반대하는 상황이었지만, 미테랑 대통령이 사형제 폐지를 밀어붙였습니다. 모든 법을 다 국민 지지로만 판단해선 안 되죠."
<야생초 편지>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의 저자인 황대권(53) 생명평화결사 교육위원장이 요즘 바쁘다. 오는 12월 30일 우리나라가 만 10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폐지국'에 이름을 올리기 때문이다. 사형제 폐지를 앞장서 주장해왔던 그를 찾는 곳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
26일(수) 황 위원장을 서울 광화문 어느 찻집에서 만났다. 하루 전 충북 영동에서 올라온 그는 가벼운 생활한복 차림이었다. "건강해 보인다"고 말하려는 순간, 황 위원장이 먼저 눈을 비비며 "눈이 많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라고. 시골에 살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바쁜 생활을 하고 있음을 그의 나빠진 눈이 말해주고 있다.
그는 <야생초 편지>로 유명한 작가다. 게다가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로 생명평화 운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13년 2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며 사형선고까지 받은 바 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85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3개월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짧은 기간이지만 3개월 동안 그는 사형수 신분이었다. 그에게 사형이란 이론이 아니라 뚜렷한 경험이다. 감옥 생활동안 그가 만난 사형수도 여럿이다. '사형제 폐지'를 자신있게 말하는 황 위원장은 모든 사람은 변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 전문이다. "사형제는 모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 지난 10년 동안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항상 국민 60~70%는 사형제를 지지했다. 이런 국민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사형제가 없는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렇다.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감옥 생활할 때 재소자는 신문을 볼 수 없었다. 똑똑해지면 통제하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90년까지 그랬다. 91년부터 신문을 읽게 됐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재소자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면서 싸움이나 소란도 줄어들었다. 사형제 폐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 사형제를 말할 때 항상 따라오는 말이 '인권'이다. 그런데 인권 측면에서 보자면 종신형이 오히려 더 가혹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양면성이 있다고 본다. 내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생명에 대한 관점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살해할 권리는 없다. 두 번째는 생태 관점이다. 모든 생명은 다양한 방법으로 번성할 권리가 있다. 사형은 모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종신형은 가능성이 있다. 때론 감옥 안에서 득도할 수도 있다. 나도 감옥에서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았다. 또 하나는 다른 재소자들을 위해서다. 무기수들은 다른 재소자들의 형님 역할을 한다. 재소자들이 교도관 말은 안 들어도 무기수 말은 듣는다. 교도소 전체 분위기를 좋게 해 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 경향도 가능하다. 고급 범죄를 가르칠 수 있다. 그렇다고 더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해선 안 된다."
- 감옥에서 만난 사형수들에게서 정말 변화 가능성을 읽었나.
"물론이다. 사형수를 여럿 만났는데, 몇몇 사람은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정말 큰 인물이 됐을 것이라고 느꼈다. 단지 불우한 환경에서 정상 교육을 못 받아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살인을 저지른 사람 중 80~90%는 우발 살인이다. 계획 살인은 얼마 안 된다. 자기 잘못 뉘우치고 올바로 살겠다고 하면 봐줘야 한다." - 방금 우발 살인과 계획 살인을 나눴다. 그렇다면 계획 살인자들에 대해선 잣대가 달라야 하지 않나.
"'유영철처럼 악마와 같은 살인마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을 어떻게 그 사람에게만 죄를 물을 수 있나. 모든 잘못을 그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 사회는 극심한 피라미드형 구조다. 삼각형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떨어지면 극심한 분노와 원한을 가진다. 사형제는 이런 사람들을 만든 사회에는 전혀 잘못을 묻지 않고, 오로지 그 결과물인 사람에게만 책임을 묻는 제도다."
- 모든 사람이 다 교화가 된다고 믿는 것인가. '사이코패스(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교화가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것 아닌가.
"종교 관점에선 '변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변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선교는 불가능하다. 생각해봐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나. 사이코패스도 환자다. 사회가 치료해야 한다. 9·11 테러 때 미국이 테러리스트를 모두 사형시켰다. 그렇다고 테러가 없어졌나? 아니다. 미국 사회가 그대로인데. 마찬가지다. 사형시킨다고 해서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전과자 감싸줘야 하는데, 귀찮다고 사형시키는 것 아닌가"
- '자유의사'라는 차원에서 판단해보자. 무기수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사형을 시켜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에서 그렇게 사형한 사례가 있다. 그럴 때 사형제가 탈출구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사형수 생활을 3개월 했다. 온갖 감정들이 생기더라. 혼돈·자포자기·분노…. 하루하루 어찌 될까 불안했다. 어떤 사형수들은 불안을 빨리 끝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했다. 하지만 그 때 감정은 정상 감정이라고 볼 수 없다. 극도로 불안한 상태다. 법정에서도 정신병이 있으면 정상 참작하지 않나."
- 영국이 1966년 사형제를 폐지했는데, 이후 20년 동안 살인범죄가 60% 늘었다. 사회 관리 차원에서 어느 정도 희생은 필요한 것 아닌가.
"그 반대 통계도 얼마든지 있다(웃음). 한 통계만 갖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단 이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형제가 있다고 해서 범죄가 준다는 근거는 없다. 미국을 봐라. 폐지했다고 해서 꼭 는다고 볼 순 없다."
- 개인 감정은 어찌 할 것인가.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누구나 원한이나 복수심이 생긴다.
"가해자를 죽인다고 해서 치유되나? 아니다. 일시적으로 위안이나 통쾌함 느껴도 절대 치유는 안 된다. 치유는 오로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형제를 없애자는 것이다. 가해자가 살아 있어야 피해자가 치유를 할 수 있다. 가해자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 피해자도 정화가 된다. 30년 동안 사형수를 보살핀 수녀님이 있다. 그 분은 사형수들이 대부분 변하는 것을 봤다고 말씀하셨다. 그 과정이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런데 그 분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교정해 놓으면 국가는 사형을 집행한다. 너무 어이가 없지 않나."
- 개인 생각을 알고 싶다. 모든 사람이 다 변한다고 보나.
"변하는 내용에 대해선 솔직히 반반이다. 수녀님들은 사형수들과 생활한 적은 없다. 바깥에서 본 것이니까 나와는 다르다. 나는 같이 살아봤다. 사회에서도 자주 만났다. 변화하지만 좋게 변할 수도 있고, 나쁘게 변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변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좋게 변하도록 하기 위해 사회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전과자라고 외면하면 그 전과자가 과연 좋게 변하겠나? 사회가 따뜻하게 감싸줘야 한다. 이런 과정이 귀찮으니까 '그냥 사형하자'고 하는 것 아닌가."
"인권 법률, 지금껏 '시기상조' 아닌 적 없었다"
황대권씨는 우리사회가 사형제를 폐지하면 훨씬 밝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 김대홍
- 사형수들을 위해 세금 내는 게 아깝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글 읽어봤다. 그런데 사형수가 무기수보다 돈이 적게 드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최근 사형수 관리 비용이 많이 들어 종신형제로 다시 바꾸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형수는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옷이나 신발, 식기구 등 모든 것을 특별 제작해야 한다. 우리도 사회가 발전하고 관리방법이 발달하면 사형수가 무기수보다 더 돈이 많이 들 것이다. '사형이 싸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당장만 본 것이다."
- 그래도 어쨌든 헌법재판소가 '사형제가 합헌'이라고 하지 않았나.
"당시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지만,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시기상조'라는 말이다. 이에 관해선 내가 아는 분이 아주 적절한 답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인권에 관한 법률이 나왔을 때 '시기상조'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인권 법률은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다. 당연히 기득권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인권 법률은 큰 흐름 속에서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다."
-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나.
"우선 우려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 인권 의식이 많이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사형제를 폐지했다고 하면 전세계가 주목한다. 그러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당연히 의식한다. 올림픽 월드컵 치를 때 국민 의식이 한 단계 높아진 것처럼 사형제 폐지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래도 좀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긍심도 많이 느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본다."
-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죽이는 사람은 죽이는 사람과 만나게 되고, 죽이는 마음은 죽이는 마음과 만나게 된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흉악해진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사람을 죽이는 마음을 버린다면, 내 주위엔 그런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밝아질 것이라고 본다. 결국 사형제 폐지는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을 살리는 길이다."
<엄지뉴스 - 휴대폰 메시지(문자·사진·동영상)를 보내주세요. #5505> 
by 태방 2007. 12. 27. 14:24
| 1 2 3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