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nogari9/100034217043


 에픽하이 백야
 
알기도 전에 느낀 고독이란 단어의 뜻
세상은 쉽게 변해 매순간이 과거의 끝
그래 나 차가워진 듯, 그게 나의 방어인 듯
비극이 단연 이 극작가의 사명인 듯

과연 지긋지긋한 생활의 끝에
끈처럼 풀릴까? 미숙한 내 맘의 문제
세월의 행진 속에 미급한 내 발의 무게
늘 시급한 세상의 숙제 잊은 듯 한 제자리뿐인데

독한 술에 취해 늘 가위 눌린 듯 날 구속한 꿈의 뒤에
그림자, 환청인가? 뒤를 잠시 보니
어느새 귓가엔 낡은 필름 되감기는 소리

눈 떠 보니 yesterday, 수줍던 그 때
책 속에 낙엽을 둔 채 꿈을 줍던 그대
계속해 아무도 모르게 웃고 울던 그대
창밖에 홀로 바람에 불던 그네

어둡던 그대는 나였지, 시작에서
벌써부터 얼어붙어있던 심장에서
책에 주인공과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감성이 민감 했었던 나를 위안했어

길고 긴 긴 잠에서, 눈을 떠, 형제와 다른
사고가 사고와 부딪혀, 형태를 찾은 그 순간에 고독...
성경공부 시간에 내뱉은 신성 모독

그 토록 순종했던 내 맑은 피가
선악과의 거름이 돼, 그 작은 씨가
자랐는데 그 누가 사상의 순결을 가르치나?
운명을 향한 반역심이 내 하마르티아

가슴이 아프니까 지쳤겠지, 아버지가 날 외면했지
아들인가 싶었겠지, 너무 어리석어
내 글씨가 내 손에서 짧은 시가 되곤 했어
남은 시간 계속해서 서서히 걸어

때론 달렸고 벽에 걸린 달력도
낡아지며 낙엽도 내 맘에 쌓였고
흐트러진 목표와 초점, 무심코 나 쫓던
무지개의 끝엔 '나'란 무인도가 중점

때론 도망치고 싶은데 멈출 수 없는 건
아직도 공책을 찢고 돌아설 수 없는 건
세상의 파도속에서, 사상의 감옥 속에서
밤이 찾아오면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바다를 뒤엎을 수천마의 피를 봤지
진실의 거짓과 거짓의 진실을 봤지
쇠사슬을 목에 차는 지식의 사치
벽이 된 눈에 못을 박은 현실의 망치

힙합씬의 가치, 그 따윈 관심 없어
내 꿈은 나와 너 보다 훨씬 커
죽길 바란다면 죽어줄게
웃겨주길 바란다면 그저 바보처럼 웃어줄게

땅속에 눕혀 줄 때, When my body turns cold
You will know, I remapped the human soul
When my body turns cold You will know,
I remapped the human soul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돌리고 파
내 혼을 괴롭힐 수 있다면 목 졸리고 파
불상의 목이 돌아갈만한 혼이 녹아
있다고 모두 모아 놓고 귀를 속이고 파

난 언제부터 였을까 비트에 비틀리는 시를
갖고 매일 밤 시름해 이끌리는 길을
가지고 다시 또 고민에 빠지고
한 숨에 나를 가리고 불안에 떨어 아직도

모두가 태양은 식을 수 없다 말하지
어둔 밤하늘에 달빛은 뭐라 말할지
모든 게 뜨고 지는 이치 속에 나 역시
두려울 수 밖에 없어 난 너무나 가엽지

안정에 다가섰는가 말하자마자
발걸음이 빨라졌는가? 살아나봤자
결부 될 수 없는 이상과 현실에 강
사하라 사막의 바람처럼 먼지의 삶

아직도 살아있다는게 신기할 뿐
어떻게 명을 이어갈지 만을 인지할 뿐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에 빛이 나를
선택 할 줄은 몰랐으니 뱉어 지친 한숨

내 머리 속에서 시작과 끝의 결정
계속해서 비난과 품은 열정
그 사이에 대답은 알지 못하고
죽은 듯 살아가고 있어 나를 남이 논하고

쓰러진 내가 뭘 더 바라겠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괜한 발악해서
그나마 내 손에 안에 담긴 진심 어린 삶이
거짓에 검게 물들어가지 않기를 감히

바라고 또 바래 답은 이미 내 앞에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 속에 바친 나만의 한계
알고 있어 못 올라 갈 수 있단 걸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나는 할 수 없단 걸

가빠진 숨을 몰라 쉬며 멀어지는 과걸 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이 기쁨이 기를 오히려
눈물을 잘라 오려 와인 잔에 담아 고여
져 버린 내 열정 피와 섞어 축배로 남아 놓여

지기를 바라 눈물로 빚은 광대
검은 안대 속 안개 위를 걸어 빛은 광대
하단 걸 알지만 가려서 볼 수 있다면
장막 속에 숨 쉰다면 찾아내 손에 쥔다면

허기진 가슴 안에 꽃은 필 수 있을까?
아직도 찾지 못한 답에 꽃은 질 수 없으리
운명도 저무니 영원히 쉴 수 없으니
해답을 가슴에 담아서 긴 숨 얻으리

확실한 가치와 큰 믿음 바치는
아침의 태양 손에 빈틈으로 안기는
현실의 결의는 먼지의 무게보다 가볍다
다시금 타오르는 꿈의 아우라

모든 걸 풀 수 있는 답을 간직한
인간의 영혼의 지도를 새롭게 밝힌다
인간의 영혼의 지도를 새롭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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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앨범을 사면 1번 트랙을 들어본다(인트로를 제외한)
첫 트랙이 좋으면 그 앨범은 좋다라는 신념이 있을 정도로
1번트랙 예찬론을 펼치는 나
 
에픽하이 신보의 1번 트랙은 이 노래다
역시 좋다
 
타블로의 가사 스타일이 맘에든다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는 글자를 줄줄 꺼내놓은 듯한 가사
말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
저렇게 자유연상하듯 주절거리며 나오는 사고의 표현이 참 맘에 든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예술을 많이 해야한다
 
매순간이 과거의 끝이라니
이 얼마나 참신하고 끝내주는 가사인가
by 태방 2007. 2. 11. 23:07


http://blog.naver.com/nogari9/100034091808

11개 서민단체, 대통령후보 선호 ‘김근태 1위’



전국철거민협의회중앙회,전국서민복지연합,전국철거민선교회 등 11개 단체로 구성된 ‘서민의 힘’은 회원 20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통령 후보 선호도 조사 결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30.0%의 지지로 1위를 차지했다고 8일 밝혔다.

2위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28.4%),3위는 고건 전 국무총리(12.3%),4위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11.5%)으로 집계됐다. 이는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와는 크게 다른 수치다. 일반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달리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각각 5위와 7위에 그쳤다.

김 의장은 5개 항목으로 이뤄진 질문항목 중 ‘부동산투기근절 정책을 가장 잘 실시할 것으로 보이는 지도자’,‘사회양극화 해소와 사회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정치발전과 통일을 위해 가장 많이 활동할 지도자’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손 전 지사는 ‘서민의 주거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지도자’,‘서민경제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지도자’ 분야에서 1위에 올랐다.

권 의원은 부동산투기 근절 부문 4위,서민주거 안정 3위,사회양극화 해소 3위 등을 기록했고 이 전시장은 부동산투기근절 5위,서민경제활성화 4위,정치발전과 통일분야 5위를 차지했다.

서민의 힘 측은 “회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 최근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후보들에 대한 선호도는 떨어지는 반면 개혁정책 이미지로 잘 알려진 후보들이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by 태방 2007. 2. 8. 15:18

http://blog.naver.com/nogari9/100034091191

[머니투데이]2007년1월10일 사설-개헌, 물건은 좋은데 장사꾼이 맘에 안든다?
뉴스스크랩

2007/01/16 03:46

 

개헌, 물건은 좋은데 장사꾼이?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김준형 온라인총괄부장 | 01/10 11:08

image


동네 아파트 지하 1층에 대형 할인마트가 생겼다.
오래전부터 1층에 있던 구멍가게에 비해 값도 싸고 물건 종류도 많다. 한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은 구멍가게로 향하곤 했다. 구멍가게 주인이 같은 아파트 사는 주민인데 반해, 지하 마트 주인은 생면부지 사람인데다 영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주민들은 뻔히 아는 처지에 마트로 내려가다가 구멍가게 주인 얼굴 마주치는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샀다.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한 두명씩 이탈자가 생기더니 결국은 다들 할인마트를 찾게 돼 구멍가게는 문을 닫고 말았다. 문제는 물건이지 파는 장사꾼이 아닌 탓이다.

물론 경제주체가 늘 현명한 것은 아니어서 합리적 기대가설에 입각한 경제학 이론이 곳곳에서 펑크가 발견된다. 행동경제학같은 분야가 생겨나고, 1978년과 2002년 허버트 사이먼과 다니엘 카너먼이 이런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이때문이다.
사람들이 가끔은 비합리적이고, 비계산적이라고 해도, 판단 기준과 분석대상을 넓히면 결국은 '효용'이 경제적 행위의 준거가 된다. 장기적으로 봤을때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온다거나,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가 주는 효용이 눈앞의 이익보다 더 큰쪽으로 움직인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4년 연임제를 들고 나왔다. 느닷없다는 것은 발표 예고가 없었다는 점에서 느닷없는 것이고, 실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논의되면서 수면위로 불거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언론에서도 지난번 대선이 끝나자 마자 5년 단임제의 문제점을 들어 개헌의 필요성을 논했었다. 그 시기도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가 일치하는 이번이 20년만에 한번 오는 기회라는 전문가들의 제언과 기고도 잦았다.
일찌기 한나라당의 맹형규 의원이 정책위의장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권 빅뱅구상:대통령발 개헌카드’라는 글을 통해 족집게처럼 예상한 적도 있으니 충분히 '느닷있는' 일이다.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는 것이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옳은 말을 참 싸가지 없이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분야에선 노대통령이 분명 한수 위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 많고, 사석에서는 다들 그렇게들 이야기하기도 하는데('군대 가서 썩는다'는게 그렇고, '재벌그룹 회장이 구속되면 언론사가 특수를 누린다'는 말 같은게 그렇다),
대통령으로서는 좀 안그래줬으면 하는 적나라한 어법에 적절치 않은 타이밍과 장소에서 던지는 말펀치가 늘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해온터였다.
그런 이유로 콘텐츠와 상관없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즉자적인 반발'이 이 시대의 '컨셉'이 되고 있다는게 문제다.

4년연임제냐 5년단임제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수 있다. 5년 단임제 자체는 '1노2김'의 나눠먹기 결과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주화의 역사가 녹아있는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시대정신이 이제 바뀌어야 할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수 있다.
4년 연임제가 갖는 위험성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연임제가 갖는 장점은 이 지면을 빌어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만큼 많다.
중요한 것은 4년 연임이라는 '제품'이 좋으냐 자체에 대한 판단의 기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장사꾼'의 얼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선두에 이른바 '주류' 언론이 서 있다.
'긴급 여론조사'를 전하는 신문의 제목들은 한결같이 "다음 정권에서.."를 내세우고 있다.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4년 연임제에 대한 선호가 과반을 차지하는 대목은 애써 가리고 있다. 아예 4년연임에 대한 선호는 묻지도 않은 희한한 여론조사도 눈에 띈다(동아일보는 '4년 연임제가 되면 대통령의 책임정치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는가'라고 질문, 52.8%라는 반대의사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개헌논의가 '다 된 밥'에 코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읽힌다.

개헌논의는 '이미 끈 떨어진' 정권과, '다 된 밥상을 앞에 둔' 세력의 주판알 튕기기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대통령에게 '민생이 어려운만큼 경제에 전념하라'고도 한다. 유사이래 민생이 어렵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대한민국이 격변기 아니었던 때가 있었던가.
경제가 최우선 과제여야 하는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라도 경제를 핑계로 정치를 내팽개칠 일은 아니다
.
야당입장에서는 오히려 지지율 상승에 취해 개헌과 같은 중대하고 민감한 이슈를 선점하지 못한 걸 반성하고, 개헌정국을 주도해나가는게 수권세력으로서의 자신감을 보이는 일이다.

장사꾼 얼굴이 마음에 안들어도, 살때 좋은 물건 사는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쓸모가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일찍 사서 요긴하게 쓰는게 효용을 높이는 것이다. 필요하긴 한데 다른 장사꾼한테 물건을 사서 쓸수 있을때까지 5년, 심지어 20년 동안을 침만 흘리고 있는건 바보짓이다.

물론, 대통령의 제안은 정략적이다. 정략적이지 않은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헌을 내세워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정국을 주도하려는 '개헌장사'의 판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정권이 제의했다고 해서 아예 논의조차 거부하는 것은 더욱 정략적이다. 장사꾼 얼굴만 쳐다보기 전에 물건부터 좀 뜯어보자.

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7011011012016213

by 태방 2007. 2. 8. 15:03


http://blog.naver.com/nogari9/100033675369


1.

요즘 주변에서 소개팅 타령이 늘고 있다

이성친구 없다고 난리치는 친구들의 구제법중 하나

또 이제 곧 OT가 끝나고 학교별로는 신입생들이 우루루 들어올텐데

그러면 또 선배들의 작업러쉬가 시작되겠지


연애라는 행위가 지금 어떻게 인식되고 있건 말건

어쨌든 그 근원은 사랑에서 온 것이다 (그것이 에로스이든 플라토닉이든)

하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연애가 사랑이고 사랑이 연애이고 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접근할까

그냥 여자친구가 없다고 우는 남자들이 사랑찾아 소개팅을 하는걸까

그 많은 신입생들을 그렇게 사랑해서 다들 밥한끼 사준다고 왕창 불러내는 걸까


나는 소개팅도 안해보고 여자친구도 안사귀어 봤다

나는 연애 자체에 대한 큰 집착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

뭐 해봤어야 있지

그래서 그런가 연애하고 사랑하는거(요즘 청년들의 연애가치기준일 것이다)

사랑해서 연애하는거(근원적인 연애의 가치기준일것이다)

이 두가지 사이에서 심한 가치 혼돈을 느끼고 있다


누가 그러더라

일단 사귀다 보면 정들고 맘에 들면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단다

뭐 틀린말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통해서 만나는 연애와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연신 놓칠 수 없게 된다

(어찌보면 고리타분하고 어찌보면 순진한 발상이라 할수도 있겠지만)


2.

뭐 그런거 다 놓는다 치고

일단 후자로 선택을 했다 치자

그렇다면 연애는 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뭐 소위 짝사랑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 의미있는 것은

서로 주고 받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아가페적 사랑은 논외로 하고)

그렇기 때문에 짝사랑은 힘들도 아프다라는 말 많이 한다

뭐 이정도는 만인이 아는 기본 상식


여기서 또 문제가 된다

짝사랑이 아프고 힘든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큐빅처럼 딱딱 맞게 돌아가는것도 아니고

누군가 사랑을 시작해야 그 마음이 전해져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면 짝사랑은 어찌보면 필수 불가결한 사랑의 과정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참고 이겨내는것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너무나 큰 고통이고 아픔이다


이런 상황에서

짝사랑의 상대가 나에게 관심없음을 표현한다면

나는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계속 그 상대에게 구애를 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받게 될 크나큰 상처들을 막기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때그때 상황과 상대방의 성격

인연의 정도에 따라 그 수준은 조절할 수 있겠지만

어짜피 인간의 행동은 머리에서 조정되는거도 어느정도 있는 편이니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경우도 다수 있지 않는가


지금까지 몇몇의 여자를 짝사랑 해왔고

사실 실현 가능성의 여부를 두고 저울질하며

기다리는 일은 무의미 하다는 생각으로 쉽게 포기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조금씩 사랑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상황에서

내 사랑을 얻으려면 얼마나 어느정도나 기다리고 구애하며 지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이게 두번째 고민


3.

아직 연애를 해본것은 아니지만

이별에 대한 고민도 잠깐 해봤다


일방적인 통보에 의한 이별은 인연을 끊는 행위중 죽음 다음으로 잔인한 방법이랄까

차라리 다툼을 하거나 서로간의 합의하에 문제를 동감하며 헤어지는건

준비할 시간도 있을 것이고 마음의 정리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상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많은 장치 들이 있겠지만


만약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다가

상대쪽의 사랑이 식어 나에게 이별을 요청한다면

물론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그 이별을 막아보려 노력하겠지만

결국 이별하게 된다면

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 혼자서 많은 노력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거야 (슬픈 이야기지만) 뭐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이고


하지만 만약 내 사랑이 식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난 이별을 청할수가 있을까

남에게 상처주는거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상

내 사랑이 식었다고 난 상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억지로 질질 끌고가거나 하지는 않을것이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 하겠지만

만약 남은 해결책이 이별 통보밖에 없다면

난 그 말을 상대에게 진심으로 전해 줄 수 있을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말들 많이 한다

물론 헤어짐의 두려움때문에 만남을 꺼리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건 매한가지

by 태방 2007. 1. 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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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를 보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생각나요”
나는 스타벅스에 가지 않는다

<편집인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생김새만큼이나 참 다양하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거부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가령,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개인정보의 누출 우려 때문에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사람, 이마트에 가지 않는 사람, 자가용 차를 타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이유로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획 연재 - 내 삶의 불복종]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듯,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통의 힘을 믿는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런 운동은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문제들도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자, 당신에게 강요하는 대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그저 묵묵히 실천하며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는 우리 옆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루는 사람들과 명동에서 캠페인을 열기로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스타벅스 커피매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날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서로 다른 스타벅스 매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명동에만 스타벅스가 세 곳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심 속에서 스타벅스는 공공기관만큼이나 주요한 위치에서 흔히 눈에 띄곤 한다. 커피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리만치 매장 안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그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여유롭게 책을 읽는 모습들은 밖을 지나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들어가고픈 유혹에 빠져들도록 한다.

나 역시 그 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 진한 커피가 기호에 맞기도 했고 지인들과 만나는 장소로도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스타벅스 커피나 가게 안에 진열된 제품들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런 경험 탓에 스타벅스는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커피 브랜드로 성장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와 시오니즘

하지만 이제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는 약속장소로도 그 곳을 잡지 않는다. 일종의 보이콧을 선언한 셈이다. 그렇다고 나의 스타벅스 보이콧은 마치 담배를 끊는 행위처럼 지나치게 의식적이거나 단계적이지는 않았다.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발길을 끊고 그 곳 커피를 거부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시일이나 동기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작년 말 즈음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자세히 접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목도하게 되면서부터 스타벅스를 악마와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스타벅스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시킨 신화의 주인공인 하워드 슐츠 회장은 오늘날 과격 시오니스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대두되고 있다. 그는 공공연히 아랍인들을 비하하거나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하는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내뱉었고, 실제로 스타벅스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이스라엘의 군수산업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정보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랍 언론인 알바와바닷컴은 스타벅스가 이스라엘 군인 단체인 ‘볼 포 이스라엘(bowl 4 Israel)’을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또한 하워드 회장이 수상한 “이스라엘 건국 50주년 공로상”은 바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제닌 학살을 주도한 모파즈가 회장으로 있으며, 결국 이 기금은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무기박람회를 후원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들은, 내가 무심코 지불하는 커피 값이 축적될수록 팔레스타인인들의 억압과 고통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가만 보면 현대인들은 이미 주체성을 상실한 종속적인 소비 패턴 속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이 결국에는 중동지역에서의 극단적인 희비를 낳는 야만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종속이라는 점이 매우 경악스럽게 보였다. 그마저도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를 겪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미지의 오류란 이런 것이다. ‘스타벅스’ 하면 대개 도시적이면서 개방적이고 아늑한 이미지로써 사람들의 감성을 휘어잡고 있다. 하지만 흔히 ‘이미지’라는 것이 실체를 가리는 수단으로 이용되듯, 스타벅스의 실체에 기반하고 있는 진실의 이미지란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즘 부흥과 동시에 한 세기가 넘도록 벌어지고 있는 바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착취가 아닌가?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인권을 짓밟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그들의 식민주의는 갈수록 끔찍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인 고립장벽에 가두어 놓고 이동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기본이고, 오랜 세월 불법 점령과 무자비한 파괴도 모자라 매일같이 비대칭적 군사공격을 가해 ‘살아있을 권리’마저 박탈하는 일들을 벌여왔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인권유린 행위들을 스타벅스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난 다음에 그곳에서 편안히 커피를 마시는 일은 웬만해선 힘들어졌다. 더욱이 하루를 멀다하고 들려오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끔찍한 범죄소식들은, 나에게는 하루 1달러가 없어 굶주리는 어느 나라의 어린이들이나, 혹은 1달러를 더 벌기 위해 커피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문제보다도 더 참혹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살육’에 대한 양심의 고동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오늘날 부와 현대 도시생활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스타벅스는 나에겐 살육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스타벅스에 가지도,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스타벅스 로고에 새겨진 별이 곳곳에서 밝게 빛날수록 팔레스타인인들의 평화와 인권은 명멸해 간다. 스타벅스에 저항을!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인권오름 제23호] 지은

* 지은 님은 [경계를 넘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


 
by 태방 2007. 1. 23. 11:26

http://blog.naver.com/nogari9/100033397792

솔로 인생 7731일, 만 21년 60일

길다면 길수도, 짧다면 짧을수도 있는 혼자 지낸 기간이지만

경험도 적고 만남도 적고 조금은 초라해보이는 사랑성적이지만

느낀것은 많고 생각도 많이하며 언제나 되새기고 있는것이 나의 사랑생각이다


사랑에서 처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가진다

첫사랑, 첫고백, 첫연애, 첫키스, 첫이별.. 등등

처음인 만큼 충격도 크고 그만큼 느끼는것도 많은

사랑의 계단식 성장의 핵심 키포인트 들이랄까

언제나 익숙한 사랑은 없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에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함께하는 일들을 함에 있어

처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의미있고 중요하다


사랑의 감정을 알게된 이후로

사랑의 뜨거움을 느끼고, 사랑의 괴로움을 느끼고,

작게나마 사랑의 행복함도 느끼고, 잠시나마 했던 수많은 기대와 상상들

그 모든것들이 처음일때 가장 크고 성대했다는 사실은

사랑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고있는 사실중의 하나이다


나는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인줄 알았다

한 사람의 사랑하는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사랑'이라는 절대 불변의 진리가 무언가 존재하여

그 감정 하나를 알고 깨닫는것이 중요하다

인생에서 사랑은 단 하나의 존재이다라고 생각해왔다


예전에 어느 인문사회학부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잡설을 풀던 도중

하던 말이 사랑의 정의는 각자 다르다고 했었다

예전이라면 나는 그말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려고 한다

사랑이란건 그사람이 겪은 경험에 따라 혹은 생각에 따라

그사람이 고민하고 느낀대로 정의되고 그렇게 진행되어간다는 것

궂이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내 사랑이, 혹은 남의 사랑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판단할 필요가

그다지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내 사랑의 패턴과 방식 역시 많은 변화가 있다

사랑의 감정과 사랑에 대한 내 마음속의 암묵적 정의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처음 느꼈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은 어느정도 차이가 있으며

앞으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바뀔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지금 역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어렸을때는 항상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된 이후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기간과 그렇지 않은 기간과의

내 인생 살이의 변화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기간이 사랑하고 있는 기간보다 인생이 건강하고 착실한 편이다

아무래도 내 능력을 이성이 아닌 감정의 문제에 일부 제공하고 있는것이

일상을 조금이나마 불편하게 만든달까?

그만큼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나는 사랑에 투자하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난 지금 누구를 좋아하고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할까?

(나는 연애를 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을 최대한 아끼려 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책임이 존재한다고 본다 짝사랑중일때는 그 책임을 질 용기가 안난다)

그 조건이 만족하면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그 판단기준은 결국 자신이다

자신이 좋아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의미를 가지고

결국 머릿속으로 자신에게 맞는 조건과 감정의 수위를 결정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 조건의 변화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변화이고 각자에 대한 정의이다

내 마음속에서는 그 사랑이 정의된 정도를 내 경험과 주변 환경들에 따라

내 가치관의 변화에 맞게 고찰하고 고민하면서 결정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고

그만큼 사랑에 대한 각자의 기준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사랑의 기준은 첫사랑을 하게된 이후로 지속적으로 조금씩 변화해왔다

(변화일 뿐 발전은 아니다 사랑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없는 이상 그냥 변화하는 것이다)

그 변화의 방향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단순하고 강렬한 것에서

좀 더 복잡하고 이성적인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인데 이성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것은 어찌보면 모순적이다

이러한 방향의 변화는 최종적으로는 사랑의 소멸을 만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중2때 반 친구를 처음 좋아하던 때가 생각난다

누군가가 좋아진 그 감정을 나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어

밤낮을 지새우던 시간이 참 많았던것 같다

수업도 안듣고 그 여자애만 멍하니 보고있었던 기억

그때는 그게 사랑이었고 행복이었다


고등학교때 했던 사랑은 좀 더 현실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중학교때는 그냥 좋아하면 그만이었고 그것에 충실하고 매진했지만

고등학교때는 나를 꾸며야 했고, 잘보여야 했으며, 친해져야만 했다

그것이 사랑의 지속을 가능케 하고,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랑에 조금이나마 이성적 문제를 포함시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쉽게 말하면 '작업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게 고민을 하고 많은 노력이 시도되었다


내 사랑인생의 제대로된 시작은 대학교때부터로 봐야 옳지 않을까 싶다

학업으로 비유하자면 고등학교때 까지는 개론서 읽으면서 대충 훑기만 했다면

대학교때부터는 전공서적을 보면서 원리를 이해하고 문제푸는 연습을 많이했다


대학 1학년때의 한 분반친구를 좋아했던 경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랑의 카테고리에서 빼버릴 수도 있구나 라는 고민을 던져준

내 사랑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커다란 쇼크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고, 나만의 문제가 아닌 남과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력을 해도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것

그때문에 감정을 쉽게 내어주고 사랑에 모두 던져버리는 것은

나는 물론 남에게도 커다란 부담을 주고 책임을 던져 준다는 것

사랑 성공의 확률이 높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이 화살로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 사실을 알게되고 깨닫게 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해야하는 경우와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이후의 경험들에도 다양한 의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여자들 죽 읇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 이야기까지는 쓸필요 없지 않나 싶다


요즘 다시 사랑에 대한 고민이 늘고 있다

본 활동 무대를 포항에서 서울로 옮긴 이후로

학교에서 느꼈던 몇 안되는 이성들에 대한 사랑의 경험들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넓은 이성들과의 만남은 문화적 쇼크로서 다가올만 했었고

그속에서 또다른 사랑을 발견하기위한 다양한 노력과 경험들이

사랑의 가치관 변화에 또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요즘 고민하는 가장 큰 고민은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의 고민이다

좋게 말하면 관심의 스펙트럼이 넓고, 나쁘게 말하면 눈이 낮다고 할 정도로

나는 내 주변의 많은 이성들에게 매력을 찾고 느끼고 있다

공대생활을 하는동안 한 경험과 다른 경험때문에 생긴 순간적인 역효과 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주변의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좋다고 느끼고 있다


물론 그 정도의 경중이 존재하기에

누가 더 좋고 누가 덜 좋고를 판단하고 느끼는것은 가능하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도 역시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뭐 내가 느끼는 매력인데 내가 결정하면 어떠한가


좋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은 몇명 없다

그런 사람들을 알게되고 만나면 하하가 맨날 말하는

'이번엔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아'라는 말처럼

정말 내곁에 두고 싶고 함께 하고 싶고 사랑을 나누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사람을 알게되고 그런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또 좋은 결론이 나게 된다면

사실 이러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에게 존재하는 신은 나에게 끊임없는 실패를 던져주어

나의 사랑 승률을 몇년째 0%로 유지시켜줌과 동시에

다시한번 나에게 그 어느것에도 집중하기 힘들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좋은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버리면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한 고민이 내 머릿속에 추가되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반하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함께하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러한 감정들에 충실하는 동안 겪은 많은 고통과 슬픔때문에

그사람의 매력에 반하여 두근거리고 매일 생각나는 사람보다는

함께하면 좋고 행복하고, 나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그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오고 있었는데


좋은 사람도 상황에 따라 나에게 기쁨만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와 동시에 사랑은 근본적으로 감정의 문제라는 사실을

내 주변의 수많은 이성들을 볼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우가 생긴다는 사실을 통해

다시한번 주지받음을 통해

내 사랑의 중심을 이성에 두어야 하는지 감정에 두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찰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좋은 사람을 좋아하면 좋게 풀릴줄 알았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그 와중에도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사람임에도

매력을 느끼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둘 중 어느곳에 경중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이 고민에 대한 결론은

내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첫 연애를 성공하게 되는가에 따라 바뀌게 될것 같다

그 경험이 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 변화를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단상이라고 했지만 좀 길게 적은듯 하다..

이 글을 몇명이나 읽을까

by 태방 2007. 1. 21. 04:02

http://blog.naver.com/nogari9/100033396825

여캠에서 조원들끼리 모여

새벽 3~4시쯤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전까지는 다른 조원들의 겐세이가 너무 심해서;;)

서로 본지 이틀밖에 안된 사람들인데도

사실 모두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라는거는 한눈에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고

다들 진솔하고 편했기 때문에 정말 의도치않게 가슴 깊은곳의 이야기까지

모두에게 쉽게 할 수 있어서 참 기분이 좋았었다


그 도중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참으로 분위기 어색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채영이 형님이;;

뜬금없이 '자신이 가장 후회했던 일이나 죄책감을 느꼈던 일을 말해보라'라고 하더라


그때까지 술자리 공식 이야기인 이성문제 이야기가 나오질 않던 상황에

내가 자연스러 먼저 꺼내면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 감상적으로 떠들어 대긴 했지만;;

정말 내인생에서 남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엄청난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일을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답변해 주었다


나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책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성문제 이야기를 먼저 꺼내긴 했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초점은 죄책감에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다들 자신이 이성에게 못되게 굴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죄책감이 느껴졌던 일을 말했을 뿐인데 다들 공통된 주제로 귀결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어찌보면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게


죄책감이라는것은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드는 책무 같은 거랄까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지금이던 혹은 나중이건 알게 되어

그 사실에 책무를 느껴 괴로워 한다는 감정일텐데


사랑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

자신이 겪은 아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그 고통을 상대방에게 주어졌을때의 그 죄의식

자신이 남에게 고통을 준 매개체였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그사람에게 되려 화살로 돌아와 괴로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감정의 아픔중에서 사랑의 아픔을

가장 크게 느끼는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Worse then the total agony of being in love?"

                                         - Love Actually 中

by 태방 2007. 1. 21. 02:48
[63호] 잡아요 2007.01.21 01:47
http://paper.cyworld.com/simsimpuleea/1989133
 


 

하지만

역시


귀찮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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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7. 1. 21. 01:47

http://blog.naver.com/nogari9/100033239860

 
출처 뉴스 > 일다 2006-10-30 02:39

뉴스 : 생각의 변화, 삶의 변화
생각의 변화, 삶의 변화
[일다 2006-10-30 02:39]
대학에 입학한 뒤로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너는 참 변한 게 없구나”, “그대로네!”라는 말들을 한다. 그럴 때면 가만히 웃으면서 “내면은 많이 변했어!”라고 대답한다. 멋지게 변할 거야, 달라질 거야! 라며 다짐하듯 말하고는 끝에 꼭 “나중에…”라고 변명하듯 덧붙이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변하고 있다.’

어렸을 적에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통령, 우주조종사, 피아니스트, 화가, 발레리나 등을 대며 그저 멋있어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러니까 매우 허무맹랑한 단어들을 자랑스럽게 쏟아내곤 했다. 말해 놓고도 내가 뭘 하고 싶다는 건지 몰랐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의 대답에 꽤나 만족해하시는 눈치였다. 나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인생은 따로 돌아갔다. 공부를 해야지, 대학에 가야지, 이걸로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걸 해야 하나 라는 핑계들을 갖다 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허망한 꿈을 마음으로 좇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좌절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는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더는 그러지 말자,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의 한철을 대부분 어떤 직업에 대한 준비시기로 보내기엔 한 번뿐인 내 삶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고등학교를 준비하고,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을, 대학에서는 취업을, 그렇게 빙빙 돌다 문득 속아 산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그렇지만 하소연할 곳은 없어지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평소 흠모하던 곳에 가보고 싶으면 정말 가는 거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혹은 걸어서. 변화는 지금 내가 떼는 한 걸음을 시작으로 이뤄진다.

또 한 가지 삶의 변화를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TV를 끄는 일이다. 대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늘렸다. 일방적으로 전송되는 전파에 온 생각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이 생기는 대상에 대한 자료는 직접 선택해서 찾아본다. 그리고 더 많이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친구들과 그런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민하던 일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작은 일이라도 무엇인가 한다. 1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혼자서 생각하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 가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했다. 그 동안 다른 사람의 생각, 다른 사람의 취향에 길들여져 ‘나’의 생각은 없고, 그 때문에 단순한 일상어 수준에서 반복되는 단어들 말고는 내 자신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제는 교수님 한 분과 친구와 저녁을 함께 먹을 일이 있었다. 그 친구가 대화 중에 교수님께 “교수님은 꿈이 뭐에요?”라고 여쭈었다. “응, 나는 책을 꼭 쓰고 싶어, 세 권 정도.” 답변을 들으니 사뭇 진지하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기분 좋은 꿈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 꿈꾸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현실에 발을 딛고 꾸는 그들의 꿈은, 내가 어렸을 때 뱉던 공허한 단어들과 어떻게 다를까? 나이가 들어서도 누군가 내게 ‘꿈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져줄까? 적어도 나 스스로, 사회적 나이에 상관 없이 내 꿈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할 수 있을까? 계속 꿈꾸고, 걷고, 질문하고, 변화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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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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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7. 1. 17. 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