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nogari9/100049506335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얼마나 열정적인가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얼마나 불타오르는가


진정 원하는것이 있다면

진정 바라는것이 있다면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마음보다 몸이 먼저

그렇게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생각하지 않아도 고민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들

그렇게 달려가버리는 것들


그것들을 향해 얼마나 불타올랐는가




감히 나는 내 인생에 끝없는 열정을 담는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것을 놓쳐고 얻고싶은 그것

내가 원하는 세상, 내가 원하는 꿈, 미래

그것의 희망을 한 순간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수 있다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

그 열정이, 앞뒤 안가리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내 열정이

나를 언제나 굳건히 지켜주고, 머리 꼭대기의 최 상위의 욕구를 해결해 준다

뜨거운 가슴이 나를 불태우며 장렬히 내 기력을 연소시킨다

한걸음 다가가기 위해 오직 한걸음 다가가기 위해


안되는 것들이 많다

세상은 복잡하고 그리 만만치 않기에

언제나 이상을 노래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간다

현실은 현실이다. 거부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은 나의 열정에 쉼없이 물을 끼얹고

썩어버린, 도려낸 가슴의 한쪽의 고름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놓아버린 희망을 다시 드는순간 손에는 화상의 화끈거림이 나를 붙잡고

멈춰버린 걸음을 움직이는 순간 발에는 고통의 물집이 나를 붙잡는다


그렇게 몇번이고 불타 버렸을까

나를 버리고 또 버리며 태웠던 내 젊음의 희망은

언제나 그렇듯 작렬하게 산화하여 사라져 버린다

아니 작렬하기도 전에 혼을 빼앗아 버린다

그렇게 넋을 놓아버린다


현실을 몰랐던 아직은 어린 시절

그저 문을 열기위해 몸을 내던지던 그때는

힘든줄도 몰랐다, 지칠줄도 몰랐다

하지만 현실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지금

그 문을 열기위해 열쇠를 찾고 망치도 찾지만

그 문이 열쇠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 조용히 이야기 하고나면

그 문이 쇠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 조용히 이야기하고 나면

나는 열쇠를 찾을 힘도 망치를 들 힘을 찾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의 객기와 같은 열정은 이제 무의미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알아가는 나에게 남아있는 열정도 바닥을 보인가

그렇게 조용히 죽어가고만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용자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고 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할 무기력함의 연속

이대로 살다가는 차라리 죽어버림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돈키호테의 영감과도 유사한 나의 피

그 피는 나를 어느새 불사조가 되도록 만들고 있다

언제나 불타고 있는 불사조

그는 자신을 태우지도, 재를 남기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체로 불이 되어 언제나 불타오른다

그렇게 곧이 곧대로 끝까지 살아가리라

스물넷의 한심한 고민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베로니카의 때이른 결정이 돌아오지 않게끔

조금은 미쳐버린 상태로 난 영원히 내 상처를 뜯어내리라

그렇게 희망을 노래하리라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 처럼

그렇게 노래하리라

by 태방 2008. 4. 7. 00:39
http://blog.naver.com/nogari9/100049396616

버려진 족속이 되고 나면

이제는 그리워 하는 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그런 말도안되는 슬픔이 찾아 오기도 하는거야


사람이 사람을 죽여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지

내 속에서 남을 빵빵 쏴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내 안에도 없는 사람을 빵빵 쏴 죽이고

그렇게 실컷 죽이고 나서야

에이 다 쓸모없어를 외치며 장렬히

나 스스로도 빵빵 쏴 죽이는거야


죽어가는 이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지

그래서 더 그리워 한다는 거야

남은거라곤 아련히 물들은 핏자국 뿐이거든


내가 당당히 다가서서

총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고 나면

또다른 시작이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나에게는 이미 또다른 죽음이라고 말 하게 되면

그건 쓸데없는 인생의 반복이 되고

난 삶의 이유를 잃게 되어 버리지


주변의 모든 것들은 밝게 빛나고

덕분에 나 역시 밝게 빛나게 되면

내 방문틈으로 그 작은 빛 하나 잠시 나를 비추게 되지

하지만 더이상 초는 남아있지 않아

방문앞에 기웃거리던 사람들

아니 내가 기여코 방문앞으로 끌고온 사람들이

기분나쁘다는 듯 초들을 부러트리고 도망가지

그래놓고 내가 총을 빵 쏴 죽이면

주구장창 나만 욕을 먹는거야 내가 바보라고

그러면 난 또 문을 잠궈놓고 엉엉 우는거야 바보같이

문밖이 아무리 밝아봐야 쓸모 없어

어떻게든 내 방은 한순간도 밝아지지 않아

그게 현실이야 그게 사실이고

어떤 미사여구로도 포장이 안되 더이상

방문앞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포장지들은

나약한 풀의 점성때문에 반쯤은 다 떨어져 있지

겉도 속도 모두 그렇게 낡아 가는거야

그게 현실이야 그게 사실이고


망나니가 칼을 들고 칼춤을 추고 있어

벨것도 없으면서 허공을 휙휙 가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김에 취해

동아줄로 꽁꽁 묶어놓은 죄인의 목을 뎅겅 치는거야

살아있는 사람이 목숨이 떨어질 것을 모두가 알아

하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망나니만 그걸 모르지

그래놓고 술이 깨고 나면 목이 잘려나간 시체를 보며

슬퍼할까 아니면 기뻐할까?

정말 신분이 미천해 돈 벌것이 없어 칼춤을 추는 망나니라면

매일 형집행일 마다 가슴속에는 크나큰 고통들이 가득하지 않을까


그냥 그렇게 넘어갈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거야


쓸데 없고 쓸모없는 고민이야

결국 이러다가 여기저기 회사 면접보듯 기웃기웃 거리며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살아가겠지 그게 현실이야

아니라는 환상을 백번을 만들어 봐야 또 환상이야

방속에 들어앉아 죽을만큼 머리를 짓찧어봤자

내 방만 어지러질뿐 화사하고 밝은 세상은 전혀 더러워지지 않아

나 자신을 순수하게 남기기 위해 방은 점점 더러워지고

하지만 그 순수함은 되려 더러운 세상에서 나를 이단자로 만들지

나의 변화는 아무 변화없이 고통으로 종료되는거야

고통, 고통으로 그렇게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면

그 어떤것도 무감각하게 다가온다는거야

열정이고 신념이고 남지않아. 그냥 고깃덩어리야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있는 생각없는 고깃덩어리

애초에 고기로 시작한 사람들보다 순수한거야

하지만 순수한 고기이건 그냥 고기이건 아무런 관심은 안둬

다들 맛좋은 고깃덩어리 찾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

머리에 리본단 고깃 덩어리는 가슴에 A+를 박은 고기에게 달려가

현실이 그래 순수는 없거든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하거든


순수함은 절대 변절하지 않아

변절된 사람들은 순수하기를 포기한것이 아니야

애초에 그 사람의 순수는 거기까지 인거야

순수한 정신머리가 고깃덩어리가 되었다고

변절했다 욕할 필요는 없어

그 고기는 거기까지만 순수한거야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거든

한낱 비곗덩어리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견뎌내야해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걸 우리가 흔히 부르는 변절이라고 하는거야

아니 정말로 힘들거든 순수라는 머저리 같은건 말야

스스로 순수에 희망을 걸지 않는 이상 고통이 사람을 파괴해버려

그러고 나면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그게 변절이야. 이게 순수를 잃어버린거야?

웃기지 마. 그사람의 순수는 단지 거기까지인것 뿐이야

그 뒤로 덮혀진 비순수의 일상은 그냥 내버려둬

그렇게 방치하는게 그나마 방안이라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


순수한 인간의 방일수록 극도로 더러워

더러운 인간의 방일수록 극도로 깨끗해

방문에 누군가 그어놓은 빨간 낙서가 가득하고

전등 킬 새도 없이 부러진 초만 가득하고

포장지는 덕지덕지 붙인듯만듯 그렇게 널부러져 있는 문 앞에서

퀘퀘한 냄새를 풍기며 더러운 방안의 인간

난 단지 그런 인간일 뿐이야

파괴되어진, 짓니겨진 인간

모두들 무시하고 버려버리는 인간

두개 골은 반쯤 깨져있고 심장 박동은 반쯤 줄어있는

그런 인간

순수의 인간

빌어먹을 순수의 인간


이 모든걸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빌어먹을 인간

이상은 중요하지 않아

현실이 그렇다는거야

현실이

by 태방 2008. 4. 4. 01:24
http://blog.naver.com/nogari9/100049357926

맥주 한잔을 마신채 무슨 이유인지 도망치는 문 밖으로 뛰쳐 나왔다. 무엇이 그리 성급했을까.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두려웠었다. 음악이 나오는 것이 두려웠었다. 누군가 청하게 될 예의바른 손이 두려웠었다. 그렇게 뛰쳐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너무도 좋아하는 그 공간에서 나는 그 어떤 즐거움도 견디지 못한채 그렇게 뛰쳐 나왔다.

  나와 바람을 쐬며 생각했다. 왜 나는 자꾸 도망다녀야 하는가? 왜 자꾸만 스스로를 힘없이 만들고 몰아 세워야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자꾸 위축되게 만들고 작아지게 하는가? 자신감 하나 빼놓으면 시체가 되는 나에게도 그렇게 자꾸만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 누구도 확신시켜 주지 않은, 그 누구도 확인해주지 않은 내 본모습을 알게될까봐 걱정하게 되어서, 그래서 자꾸만 나를 동굴 속으로 밀어 넣어놓고 멀지간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내모습. 그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볼때마다 난 비참함에 얼굴을 들지 못한다.


  아직도 기억난다. 중학교때 그 친구의 모습. 본성이 나쁘진 않았던거 같지만 못된짓을 많이 하고 다니던 그 친구. 어렸을적 공부도 못하고 나쁜짓을 하고 다니는 아이들을 볼때 '저 친구들은 커서 뭐가 될까'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하고 다니던 시절. 그 친구에게 난 얼굴을 맞대고 정면으로 나 스스로를 저 바닥까지 던져버려야 할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 친구의 죄가 아니다. 단지 우리 반 전체를 대표해서 그 친구가 말한것 뿐이다. 아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버려 나를 기분나쁘게 할 심산으로 뱉어버린 그저 그런 비난에 불가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철저하게 부시는 일에 몰두하였다. 미움 받을 수 있는 인간, 거절 받을 수 있는 인간, 파괴되어 버릴 수 있는 인간. 나는 그런 인간으로 아무도 모르게 십수년을 살아온 것이다. 나의 죄도 아니고 너의 죄도 아니지만, 그 죄인없는 판단은 나를 스스로 죄인으로 몰고갔다. 상대를 한순간이라도 기분나쁘게 하는 순간, 나는 몹쓸놈이었고 죽일놈이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았다. 웃음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어떤일이든지 할 것만 같았다. 내 심성이 어떤놈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단 한번의 남에게 들었던 그 비난 때문에 나는 나를 지구 끝까지 죄인으로 몰고가게 되는 버릇을 가지고야 말았다. 나쁜 버릇. 쓸모없는 버릇. 하지만 그래야만 내 인생을 근근히 버텨나갈 수 있었다.


  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는 정말로 대단한 장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상대에게 즐거운 느낌을 주고 나 역시 즐거운 느낌을 받아야만 한다. 남에게 주는 리드 하나하나에 항상 정성을 기울이고 헹여 실수하면 정중히 사과할 줄 아는 매너까지 갖출 수 있는 나는, 반면 춤을 처음 배우고자 할때 아직 내가 초보자라는 걱정이 앞서 춤을 추기 두려워 하고 손을 내밀기 꺼려 한다. 춤은 남자가 먼저 청하는 것이 예의인데, 솔직해 내가 내가 청하기 보다는 청을 받아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동호회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혼자서 뿌리치고 그렇게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 허무하다. 아쉽다. 하지만 이게 편하다. 도저히 그 공간안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춤을 청할것을 두려워 하고, 춤을 청 받았는데 실력이 안되 헹여 실수라도 하면 그 죄책감에 못이겨 스트레스를 받을 것을 두려워 하느니 도망치는게 낫다. 그러는게 낫다고 애써 위로하고 위로하고나면 밀려오는 그 허무함. 난 그 허무함에 또 다시 눈물짓는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뭐 어느 면에선 맞는 말이고 어느 면에선 틀린 말이랄까. 나는 내 능력에 대해 자신한다. 내가 맘 먹고 덤비면 못할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지겨워도 난 할 수 있으니까 계속 하다보면 잘 하게 되겠지라고 되뇌이며 끝까지 도전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사람 대하는 모든것들에 대해. 상대에게 행하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걱정되고 조심스러우며 무언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상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지 않으면 당황하고, 대응해 주지않으면 불안해 하며,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자꾸만 압박하곤 한다. 아니 이제 뭐 많이 극복한 편이긴 하다. 대학교 이후 사람을 두려워 했던 것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서(이 역시 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은 유들유들하게 그냥그렇게 사람 만나는데는 자신감이 조금 붙었다.


  물론 아직까지 딱 하나 만큼은 자신감을 되찾지 못하는 것이 있다.

by 태방 2008. 4. 3.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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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꺾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성적증명서를 떼보면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은 나를 '민주투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사와 검사, TV 아나운서와정부당국의 '나으리들'은 나를 일컬어 '좌경용공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붙여준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자리 없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실업자라고 나를 비난한다. 그렇다.나는 직장이 없다. 하지만 직업은 있다. 나는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 번역을 하거나 수필을 쓰고, 어떤 때는 드라마 대본이나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의 직업을 구태여 말하자면 '자유기고가'라 할 수 있다.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책도 하나 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나는 감옥에 두 번 갔다 온 전과자이지만 예비역 육군 병장이기도 하다.폭력전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폭력배는 아니다. 한번도 남을 때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계엄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적도 있지만 그 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군대생활 32개월 동안에도 영창 한번 간 일이 없는 모범 사병이었다.
 
나는별로 잘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 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 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 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나라. 이런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이런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감옥에 잡아 가두려고 한다. 계엄령 위반이니 폭력죄니 하는 내 전과는 그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 별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6월에 수백만 국민이 했던 일들에서 보듯 아주 많은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내가 나를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이렇게 살려는 뜻을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나름대로의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이런 생활에서 찾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나가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이듯이 나도 또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나라는 인간의'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단지, 지난 십 수  년간이 사회가 나와 이웃에게 가한 억압에 맞서싸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생활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출세욕을 품게 한 '가난뱅이 의식'
 
나는 2남 4녀 중의 차남이자 다섯째이다. 태어나서 10년은 경주에서, 고교 졸업까지 10년은 대구에서 자랐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그 분은 비록 "가슴에 달 금빛 훈장도타고 갈 황금 마차도 없는" 평교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먹였고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나는 '가난뱅이'였던 적이 없다. 밥이 없어서 굶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나는 주관적으로 가난을 몹시 심각하게 경험했다.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다. 미술시간이면 두꺼운스케치북과 포스터칼라를 꺼내놓은 친구들이 낱장 켄트지를 꺼내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조심스러웠고 외풍 센 먼지투성이 우리 집은 나로 하여금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 소년기의 대부분을어두움으로 뒤덮었다.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두 살 간격으로 늘어선 6남매. 내가 중 3일 때 큰 누님과 형은 더구나 사립대학을다니고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가계였다. 빚이 늘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전부터 집에 달린 점포에 잡화상을 차렸다. 매일 새벽 시내의 큰 시장에 나가서 생선과 야채를 받아오는 중노동 때문에 심장이 약한어머니는 늘 어딘가 편찮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고 오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고 그 헌신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가난과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화가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보고서 모른 척 지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그 뒤 며칠 동안 몹시 번민하고 자학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가난의 이유를 몰랐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왜 시장아줌마가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새 빚걱정에 한숨을 쉬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대구에서 경주로 학교를 옮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이확실할 분이었다.
 
나는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한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보건소에 가서 무료로 주는 알약을 타오곤 했다. 어머니가 그 알약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경주에서 토요일이면 오던 아버지가 가끔 일직 때문에 못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면 나는 밑반찬을 가지고 경주에 갔다. 아들에게 더운 밥을 먹이려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의문을 품었다. "하숙 대신 자취를 해서 도대체 얼마나 절약될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우는 적이 많았다.


그 때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하루빨리 법관이 되어야지"
 
나는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판사'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 가장 빨리 출세해서 부모님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장한 각오로 '판사'라고 대답하면 백부님이나 당숙들은 매우 기꺼워하였다. 하지만내 부모님께서 그런 대답을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누이들이 은근히 그런 결심을 부추겼을 분이다. 나는 소위'출세'라는 것을 하기 위해 '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사회적 욕구였다.



사회적 부조리의 첫경험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 같다. 자유니 정의니 하는 빛나는단어들을 책에서 배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단어들 때문에 가슴 설레거나 잠 못 이룬 적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될때까지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이제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저 신기하게 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출범했지만,그것 역시 다음해 국민윤리 교과서에 장황하게 서술된 '한국적 민주주의' 만큼이나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씨가 간첩으로 나오는 반공드라마를 들으면서도나는 일간신문에 기둥 만한 활자로 박혀 나오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학생회장 선거가 없어지고학도호국단이란 것이 생겼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던 우리 집에 아침마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정치권력의 언론자유 탄압에 비분강개하지는 않았다. 그건 드물게 재미있는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다. 정치경제교과서에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설명한 내용과 유신헌법 조문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었지만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것을 몽땅외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잡혀간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긴급조치의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75년 당시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하여 김상진이라는 서울대학생이 할복자결한 일까지 있었지만 내가긴급조치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등생'이었다. 중학교때보다는 성적이 훨씬 향상되어 선생님들로부터 일류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수한 고교평준화 1기생'이었던 것이다. 교실구석에서 박정희와 모모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속살거리거나,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사회선생님을당황하게 하는 친구들을 나는 경멸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학생이라면 학교공부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회라는 것'에 대해,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 상황이 나에게 닥쳐왔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처럼 닥쳐왔다.
 
나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받은 봉급을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 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잡았다. 어머니가 장사 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 준 아버지, 여섯 살 때부터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소외당한다는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 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오도된 반란 : 냉소주의
 
아버지의 봉급액수를 알게 된 순간 이후, 나는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지당하신 말씀'들 속에서 거짓의 냄새를 가려낼 수 있게되었다.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 사회교과서 전체를 지배한이런 조화론적 세계관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일뿐이었다.


그것을 사회적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느낀 가난에 대해 부모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근면하고 정직하며 힘껏 일하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부모님이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장래의희망을 법관으로 잡은 데 대한 회의가 싹텄다. 유신시대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타락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관을진심으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 권력에 가까이 있고 잘만 하면 한 재산 모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러워할뿐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나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학교생활도완전히 엉망이었다. 중고등학생 3천 명이 ㄱ자 4층 하나에 몽땅 수용된 학교. 도서실 좌석이 1백 석 남짓하고 그저 교사와학생들을 족쳐서 명문대학에 많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학교운영. 교사의 평균연령이 30세를 겨우 넘고, 서울의 강남지역에여학교를 짓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두운 교실에 형광들을 더 달아달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묵살하는 재단 측의 횡포.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러하듯 학생들의 인격 함양에 신경을 쓰기엔 선생님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었고, 오직 명문대학 진학에만 눈이 팔린 우등생을 만족시키기엔 젊은 선생님들의 경륜이 부족했다.


나는 학교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엔 아무 책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꺼내놓고 혼자 공부하거나 잠을 잤다. 방학중의 보충수업에는 한시간도 참석하지 않았고 예비고사가 끝난 후 두 달간은 학교에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성이 비뚤어진 우등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어느 정도는 비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과목당 몇 만원씩 내고학원강사들에게 그룹지도를 받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 대신 가게에 앉아 영어 참고서를 읽어야 했고,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수학때문에 고민하다가 최후수단으로 수학정석과 해법수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버려야 했다.


나는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는 척척 풀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문제를 푸는 선생님의 강의를 꼬박꼬박 듣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비뚤어진 우등생 쪽으로 끊임없이몰아댔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릎 꿇고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나의 정신세계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지나쳤다.


각박한 입시교육이 쳇바퀴 속에서 선생님도 나도 혹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법관이 된다는 데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흥미나 적성으로 보자면 역사학과 언어학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하지만 그건 별로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았다. 가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루 빨리 그것을벗어나려면 법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선생님도 한숨만 내쉴 뿐 이래라 저래라 권유하지 않았다. 나는괴로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열쇠를 찾아낸 후 고민을 덮어버렸다. 그 열쇠는바로 냉소주의였다.
 
세상은 어차피 불합리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다. 꼭 논리적으로 타당한 행동만 할 수는없다. 불합리해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지 않은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뒤로는 개수작해서 돈 벌어도 남 보기에 정승같이 쓰면 칭찬 받는다. 졸업식날까지는 술 담배하면 안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그때부턴 제 마음대로 아닌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해도 합격하면 영웅대접 받지만, 선생님 말씀꼬박꼬박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서 떨어지면 병신 소리 듣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저렇게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 세상에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란없는 거야.


정 역사학이 하고 싶으면 법관 하면서도 할 수 있을 꺼야.
 
나는 사회적으로용인되는 관습이나 규범을 진리 혹은 가치와 혼동했다. 겨우 열 아홉 살 촌뜨기 주제에 마치 인생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생각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교양서적도 읽지 않고 교과서 참고서만 팠으니 사고의 폭이란 것이벼룩의 간만큼 밖에 안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썼다. 법대와 경영대,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몽땅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법대를 지망한 나는 사회계열에 원서를 낸 것이다. 누구와도상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씀이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제안을하였다.


영어과를 가서 영어를 능통하게 쓸 수있게 된 후 다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동양사람은 서양을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만해서 동양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동양이란 고작 인도와 일본뿐이다. 그러고서 다 아는것처럼 만용을 부린다. 따라서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동양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선 서양어와 서양철학을전공한 후 다시 동양철학을 연구해서 훌륭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란 것이 아버지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속으로웃었다. "아버님, 그 많은 공부할 동안 제 학비는 누가 댑니까? 돈은 언제 벌어 부모님 편안히 모시구요? 아버님은 자식들의생각을 너무 모르십니다. 왜 자식 덕에 노후에 편안히 사실 생각은 안하십니까? 아버진 너무 이상주의자세요. 현실은 냉혹하지않습니까? 전 별로 판사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판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다음날 학교에나가 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무엇인가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슴 설레야 할 그 열 아홉의 나이에 나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나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고, 화랑 관창과 김유신의 생애를 들었으며, 어버지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지당하신 말씀'에 대한 정신적 반란의 싹을 틔웠다.


하지만 내 정신의 텃밭이 너무나 황폐하고, 입시공부라는 환경이 너무나 메말랐던 탓으로 그저항의 싹에서 돋아난 것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의 가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 대학 신입생 1년간은 사실상고등학교 4학년의 의미 밖에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학생활의 첫해 : 실망과 환멸의 시기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빡빡한 입시공부의 지옥에서 그야말로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대학생활" 속으로 내던져졌다. 남들처럼 나도대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학은 상아탑이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입시지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은 지성을 가둬놓는하나의 정신적인 감옥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귀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중년의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서 나는 대학이 풍기는감옥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학문은 현실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보면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학문인가 아니면 부조리와의 싸움인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부조리와의 싸움이라고 하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게 무서워 학문 쪽을택하려니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해서는 왜 안될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데모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그 말이야!"
 
좀 짜증 섞인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도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학에 다녀보지를 않아서요. 앞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면 그저 학문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되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호통과 훈계를 듣고 나서 나는 면접시험장을 나왔다. 같이입학하는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걱정을 해 주었다. 나도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실망이 그보다 훨씬 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질문을 한단 말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고 독립된 인격체인데,데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나 토론은 몰라도 하겠냐 말겠냐를 그렇게 다그치다니. 지성인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날의 실망과 회의는 다가올 숱한 환멸의 날들에 대한 하나의 암시오, 예고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그 숱한 의문들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며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캠퍼스잔디밭에서든 단지 몇 명이 모여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난해하고 심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것과는 별개였다.
 
경제학개론강의는 미적분 강의의 연장선이었다. 제한된 액수와 화폐를 가진 소비자가 그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소비지출을하는가. 일정액의 자본을 가진 생산자가 일정한 물가와 임금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장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떻게 자본과 노동을결합하는가? 경제학 교수는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방정식과 기하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가? 어째서 아무런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평생 어마어마한 소비를 하며 호의호식하는데 하루 10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죽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에속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게는 경제학이 매우 신비롭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게느껴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의주장을 다루었지만, 정치학 교수는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를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서 몇 년 씩 징역을 살리게 하는 긴급조치. 국민의 대표인국회의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인 이상한 현실. 그것을 연구하는것,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마저도 엄격히 금지된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정치학강의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철학개론 교수는 칸트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가르쳤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1978년 대한민국 청년학도가 칸트를 연구해야 하는지,칸트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빛과 희망을 주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른 이론들은 '난삽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의 강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골라잡기와 단답형 주관식문제를 풀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해야 했지만, 대학에서는 논문식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교수님의 강의와 교과서의 핵심적인 대목을한두 페이지에 걸쳐 몽땅 암기해야 했다. 차이는 그런 정도였다.
 
하나의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자유로운질문과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지닌 교과서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했다. 지금, 그리고이 땅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고뇌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는 모든 강의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룬 주장은 이미 학문이나 과학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라면 메모 한 장 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었다. 교정 곳곳에서사복형사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학생들을 감시했고, 기숙사에서 내려오는 언덕배기에는 사시사철 무장전경을 태운 닭장차가 주둔해있었다. 데모를 한다든가 이념서클에 들면 틀림없이 처벌을 당한다는 '무서운 소문'들이 신입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유신시대의 대학에는 자유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즐기고 학점을 잘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빈부격차의 원인을 연구하며, 남북통일의 방도에 대해 토론하고, 왜 술 먹고 연애 하고 학점 따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되는가를주장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단 한 뼘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새로운 형태의, 입시공부와는다른 성격의 사회적 억압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햇다. 대학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 진학은'법관'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공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유학, 대학생활이라는 신천지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법관이란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법관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타락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위해 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의 싸움 가운데몸을 던질 것인가? 나는 대학에서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선택,성인으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는 처음 직면하는 이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생활의 첫해를 다 바쳐야 했다.



절망적인 선택 : 달걀로 바위치기
 
나는 매우 냉소적인 신입생이었다.


흔히 이념서클이라 일컬어지는 학회(學會)에 가입하여 역사와 철학,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원인에 대해 눈뜨게 되고 박정희 유신정권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지만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판사가 되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결국 나는 행동할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 자체에 대한 냉소 외에는 달리 행동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유신독재는 철옹성 같아 보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할 것이고, 그가 죽으면 후계자가 또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몇백 명이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본들 신문에 한줄 보도되지도 않고 지나간다. 돌멩이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싸워도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더욱 냉소주의를 부추겼다.
 
학교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학회에서 하는 공부는 매우 흥미로왔다. 매스컴에서는 '지하대학'이라는 이상스런 명칭을 붙여주었지만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모여 일고 책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이 끝난 후 봉천동의 후미진막걸리집에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다. 매월 한 번씩은 야외로 나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했다.
 
여름과겨울의 방학에는 열흘씩 농촌 활동을 했다.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폭 넒은 이해, 논리적인 사고와발표력 등 지성인의 기본 소양을 쌓은 것은 현대식 건물과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이 있는 관악 캠퍼스가 아니라 음습한 선배의자취방과 봉천동의 쓰러져가는 막걸리집에서였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 수없었다. 여하튼 행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1학기 여름방학에 구로공단의 한 야학선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1년반의 야학활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리면 16세, 많아야 23세 사이의 여성 노동자들. 대개 전라도에서호남선·전라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공단으로 흘러 들어온 농민의 딸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에 2만 5천 원남짓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 원, 하숙비가 보통 3만 5천 원, 내가 살던 학교 기숙사의 한달 식비가 2만 1천 원, 하루 두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고등학생에게 영어·수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내가 매월 6만 원을 벌 때그들은 매주 60시간 이상 노동해서 2만 5천 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으로 먹고 입고 방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부모님의 약값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고 살았다.
 
한 달 용돈을 5백 원밖에 쓰지 않는 또순이도 있었다. 국민학교를중퇴하거나 겨우 졸업한 그들에게 국민학교 산수를 가르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밥을 굶은 적도, 내 힘으로벌어먹어야 했던 일도, 셋방살이 설움을 겪은 일도 없는 내가 스스로 가난이 싫어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다니 나는 얼마나 사치스런인간인가? 1백 원짜리 크림빵 하나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세금을 이들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국가의 녹이라는 형식으로 그세금을 얻어서 살아가는 직업을 단지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목표로 삼다니, 나는 얼마나 염치없는 자인가?


가난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이 사실은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없이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너무나 편한' 기숙사를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수없이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네번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세워졌고 단지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친대가로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교도소 담벼락 안에서 그 싱싱한 젊음을 바쳐야 했다.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감싸고 높이 좌정한판사들은 그들 순결한 젊음 위에 죄인의 너울을 뒤집어 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년 대학입시 수석합격자의 소감을 들어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어 사회정의를실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본 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억압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들을 짓밟는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이 유신체제 하에서 판사가 될 경우, 만인 후배들이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저 판사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징역 3년 4년을 선고해야 할까? 아니면무죄를 선고하고 쫓겨나야 할까? 쫓겨나려면 애초에 무엇하러 판사가 된다는 말인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고민했다.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법대에 진학하여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 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오후 2시까지 온통 고민에 휩싸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닥쳐왔을 때 나는 법대를 썼다가 지워버리고 경제학과를 써넣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몸은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경제학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취업이 순조롭기 때문에 집에다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날, 5년간이나 간직했던 법관의 꿈을 털어버리면서 나는 그만큼의 세월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했던 냉소주의와 결별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나오며 나는 가슴이 후련해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시에는 학교안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유행가를 크게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경찰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습의골방을 벗어나 행동의 광장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가슴속의 먹구름이 말짱하게 걷히지는 않았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불의와 투쟁하지 않고서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그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정치적 행동은 하나의 도덕적 결단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일 수 밖에 없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야학과 농촌활동, 학회활동과 학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행동했다. 시위대의 선봉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강의실 복도의 소화전을 열어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저 흉악한 유신체제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 해산되고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 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 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달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지역 민주노조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 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 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고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by 태방 2008. 4. 2. 09:54
http://blog.naver.com/nogari9/100049248639

당신은 꿈을 좇는가

당신은 이상을 좇는가


그것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이 세상의 꿈과 이상을 좇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정치인과 예술가이다




정치인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머리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그려낸다

내가 꿈꾸는 세상, 내가 원하는 세상

아니 이 세상이 원하는 세상.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위대한 포부가 어디있겠는가

정치인은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내기위해

언제나 노력하는 훌륭한 직업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딫쳐 이리 저리 휘둘리고

치열한 고민속에서 나온 결론으로 많은 사람들과 갑론을박하고

그러는 과정속에서 갈등과 타협으로 이상에 조금씩 다가가지만

인간의 인생만큼 정치인생도 길지 않은 일이기에

그렇게 정치인은 꿈을 조금씩 잃어 가기도

의욕을 조금씩 잃어가기도 한다


그래도 정치인은 훌륭하다

당신은 진정 세상이 아름답기를 원한적 있는가

당신은 진정 세상이 변화하기를 원한적 있는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일해본 적 있는가

제대로된 정치인은 철저히 이타적이고 봉사적이다

제대로된 정치인은 철저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또한 제대로된 정치인은 따뜻하고 포용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 마음을 먹고 세상의 꿈과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제대로된 정치인은

제대로 훌륭한 직업이다





예술가 역시 꿈과 이상을 생각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그들은 꿈과 이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노래한다

그림을 그리기도, 노래를 부르기도, 시를 쓰고 산문을 쓰기도 한다

자신의 자아가 느낀 작은 것부터 이 세상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원대한 포부까지

그들의 주제는 무궁무진하도 자유분방하다

예술가가 노래하는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들은 세상의 모순을 꼬집기도 하고, 현실의 안타까움을 한숨짓기도 한다

그들은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고, 더렵혀진 일상을 씻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상상을 인간의 오감을 이용하여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끊이지 않는 꿈과 이상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다


예술가는 언제나 고민과 고뇌에 가득 차있다

무엇이 좋은것인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끊임없이 속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하기위해

다양한 표현을 고뇌하기도 하고 자신을 억압하기도 한다

자아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빠져 들어가기도 하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오만 세상의 사물을 끊임없이 관찰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가슴속에 담긴 진정성은 느끼지 못한채

정치인은 모두 이기적인 권력야욕만 넘쳐 흐르는줄 알고

예술가는 쓸데없는 헛소리만 짓껄이는 부류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의 행복을 외치는 정치인이 거짓말쟁이라는 증거는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어 수십억에 팔려나가는 그림이 허세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고민과 고뇌속에 나온 꿈과 이상의 작품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를 못할지 언정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훌륭한 정치인과 위대한 예술가가 만들어낸 산물은

그 산물 자체만으로서 세상을 행복하게할 힘이 있다

그 힘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있는 보통사람이 존재하면

그들은 훌륭한 존재로 위대한 존재로 우리 곁에 남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복을 버리며 살아가는가

그들이 우리 대신 만들어주는 행복 역시

얼마나 많이 버리며 살아가는가

우리의 삶조차 버거워 하며 하루하루 견뎌가는 가운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우리는 얼마나 귀기울여 왔는가


나쁜 정치인과 진실된 정치인을 구분하는
허위 예술가와 진실된 예술가를 구분하는
그런 눈이 당신에게는 존재하는가?

훌륭한 정치인의 비전을 머리고 이해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당신에게는 존재하는가?

by 태방 2008. 3. 31. 00:50
http://blog.naver.com/nogari9/100048976887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게 되는 일련의 과정

그 과정을 온전히 완벽하게 지나치게 되는 사랑의 확률은

우리가 태어나서 너무나도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인생을 끝내게 되는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그만큼 각자의 개개인의 사랑의 과정과 모습들은 너무나 다양하다


온전한 과정

그 과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은 관심이 생기고 흥미가 생기고

그 흥미가 신경을 쓰이게 이끌고 그것이 설렘으로 발전하고

그 설렘이 상대의 모든점에 매력이라는 허물을 씌워

점점 설렘이 애정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을 거치고

애정이 잘해주고 싶은 마음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발산시키고

그 감정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고 그 마음이 통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교감을 주어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줄수 있는 모든것을 헌신하다

그 양의 차이에 불균등이 생기게 되고, 아님 작은 오해들이 생기게 되고

종종 한쪽이 참아가며 잘 견뎌내 가지만

그 균형이 잠깐의 실수이건, 한쪽의 거짓이건 둘 사이의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내고

그 균열이 매력이라는 허물을 걷고 불신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씌워

그 균열이 인내의 한계를 발생시키거나, 혹은 크나큰 분노를 발생시켜

둘의 처음과 같은 감정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관계의 간극을 만들어

이별이라는 슬픈 결과를 짓게 하고

그 이별이라는 결과에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대에 대한 감정

아니 그 사람이 처음에 발산했던 그 설렘과 애정이 다 씻어지지 않아

작은 오해나 잘못도 용서할 수도 있겠고, 다시 참아낼 수 있겠다 생각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크나큰 거리가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내

그렇게 힘들어 하다 시간이 기억을 잊게 해주는 그런 일련의 과정


너무나고 평범하지만

그 누구도 항상 느끼고 알아낼 수는 없는 과정


각자의 사랑에는 저 일련의 과정에서 한두군데씩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문제가 있는 위치에서는 언제나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바람둥이들은 한사람에게 애정을 쏟지 못하고 진실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며

반면 너무 외로운 사람들은 한쪽이 받기에도 과분한 사랑을 만들어 사랑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애초에 설렘을 시작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 반면

그 누구에게도 설렘을 주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닌 둘이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둘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 아닌 각자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적어도 사랑의 감정은 항상 둘이하는것이 아닐수도 있다


사랑의 과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사랑의 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수도 있으며

반면 사랑의 과정은 너무나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보일지라도

그 감정에는 불편하고 모순적이며 어리석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과정에 충실해야 하는가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가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사랑하기 위해 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과정에 집착하고 사랑의 결과에 집착하며

설렘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설렘은 사랑의 시작이지만 사랑의 정상적인 일련의 과정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행복한 사랑을 위해서는 설렘 이상의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만이 가능하다


진짜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인지, 정말 진실된 사람인지

사랑이라는 것을 나누었을때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그 본질을 명확히 알고 사랑을 했을떼 우리는 일련의 행복한 사랑의 과정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각자의 문제점에서 영원히 걸려버려

속고 속고 계속 속는 무한한 관계속에 빠져 들게 되기도 한다

바람둥이의 속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한결같은 사랑은 보이지 않을 것이며

사랑불능자에게 매력을 느껴 사랑을 나누자는 요구를 해봤자 전혀 돌아오는 답변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이 전해주는 설렘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안타깝지만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을 참고 포기하는 능력은 있겠지만

느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건 불가능 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을 느끼면서 행복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고민, 사람에 대한 고민을 늦춰서는 안된다

그냥 빠지는 대로 빠져버리는 사랑이 가져오는 슬픈 결말은

나 혼자가 아닌 남과 하는 것이기에 너무다 당연한 결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냥 좋으니까 사귀고 기분 좋으면 되는거라고 사랑을 바라보기에는

사랑의 본질은 너무나 심오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다


너무나 가벼워 지는 연애의 물결속에서

그 연애에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것이다 사랑하려고 연애하려고 하는게 사랑이 아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공유하는 가장 행복한 방법인 사랑은

연애라는 도구속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확보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상대가 사랑을 알고 있는지, 상대의 사랑이 진실된지, 그런 상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느껴보자

사랑에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행복을 풍기고 다니며

사랑에 진실된 사람은 언제나 인간미를 풍기고 다닌다

그 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갈구하고 노력하자

그것이 당신의 사랑을 행복하게 만들것이다

by 태방 2008. 3. 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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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作- 천사를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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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은 가까워질 생각을 안하고

현실과 진실은 구분이 안가고

진실과 거짓은 한끗차이로 왔다갔다


거짓 나부랭이 세상에서

진실을 외치며 살아가는건

바보같은 짓이란다

원래 그런거란다


일반적으로

착한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

왜냐면 세상이 착한놈들을 가만 내버려 두질 않기 때문이다

착한애들은 곧잘 바보가 되고

그렇게 바보가 되면 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히틀러 식으로 바라보자면 착한 사람들은 열등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 죽어야 한다


하지만

그놈의 '희망'이라는 허상을 안고

천사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착하게 살라고 외친다

아싸 좋다

얼마나 편하고 행복한가

착하게 사는거

좋다 너무좋다

이보다 더 좋은일 없다


근데 망할

안착한 놈들은

착한놈들을 바보 천치 취급을 한다

현실도 모르는 것들

무식한 것들

저러다 뒤지면 정신 차리지

그러면서


그러니 일반적으로 애초에 다 죽어버리면 더 좋다


정의, 평화, 공생, 사랑

세상의 과반은 이런 가치들을 진작에 뭍어버린채

누가 더 눈치 빠른가 싸움만 죽어라 하고있다


내 인생 목표가

'착하게 살자'였다

근데 목표를 수정하라고

이놈의 세상이 한순간도 가만두지를 않는다

아 놔

by 태방 2008. 3. 18. 00:24
http://blog.naver.com/nogari9/100048697344

어쨌건

말을 해도 이해를 시켜도

모르는건 모르는 일이야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라는건 있어

아니 평생을 좁히면 만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리 길지는 않거든

그 간격을 좁힐 수 없다면

먼저 손을 내버리는것도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그 시기를 알아낸다는건 어려운 일이야

인생이라는건 참 재미있어서

언제건 원칙이 뒤바뀔수도 있기는 하거든

물론 그 확률은 극히 낮지만 말야


그래

미래는 절대 모를 일이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정말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지

하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살아가는건

참 바보같은 짓이야

모두들 알고 있거든, 역사는 반복된다는 걸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물론 미시적인 우리의 인생은 언제냐

예외가 존재하겠지만

그 예외를 믿고 가기에는 언제나 크나큰 피곤함이 작용하지


용자들은 그 예외를 이용하곤 해

그러면 영웅이 되지

내 인생의 영웅

그 영웅은 오래 갈수도 죽어버릴 수도 있어

모를 일이야

영웅으로 살아가든, 조금씩 쌓아가든

그 가치는 누가 우월하다고 비교할 순 없어

하지만 세상은 영웅만 기억하지

난 소중히 쌓아둔 돌탑같은 것이 더 좋지만 말야


모를 일이야

정말 모를 일이야

하지만 모르는 일이야

그래서 난 모르는 일 취급을 할꺼야

혹자들은 설명할수도 없는

오만가지 원칙을 꺼내들며

자기는 너무 잘 안다고 떠들어 대지

하지만 다 웃긴 소리라는건 너도 잘 알고있어야해

인간은 자신의 과거만 알고 있을뿐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아

아니 과거도 생각하는대로 왜곡해서 안고 있지

너무 미래를 단정지어, 너무 미래를 결론짓지

반대로 미래를 버려버리기도, 미래를 포기하기도 하지

아는 일인지 모르는 일인지만 보면 되

내가 알일 이라면 아는대로 가면 되는거고

내가 모르는 일이라면 모르는대로 가면 되는거야

그렇게 갈꺼야 난


이제는 좀 알면서 살아야겠지

모르면서 살자니 온통 바보취급을 하니 말야

난 바보가 아닌데 말이지

단지 조금 더 착할뿐인데 말야

by 태방 2008. 3. 1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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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8. 3. 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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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다 싶은 때가 있어요. 그럴때는 그 일을 해야해요. 안하면 후회하게 되죠. 하지만 재미있는건 뭔지 알아요? 그일을 해도 후회할 일은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죠. 오늘 퇴근을 일찍 했는데 눈 앞에 인덕원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보였어요. 그 버스를 타면 난 동호회로 바로 갔을수도 있죠. 가면 아마 11시까지 춤을 추다 뒷풀이를 가고, 그러면 집에 두시쯤 들어와 아무것도 못하고 뻗어버리겠죠? 재미있는 네이트온도 못하고, 낼 아침에도 출근하면 골골 거릴꺼에요. 그래서 안갔어요. 사실 후회스러워요. 동호회에 가면 즐겁거든요. 하지만 안가면 즐거울지 안즐거울지 모르는 일이에요. 다행이 즐거웠어요. 근데 잠은 일찍 못자게 됬네요. 후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쩄든 뭐 그렇게 지나갔어요.

  생각을 많이하고 살아요. 후회할껀지 안할껀지 언제나 계산하죠. 그래서 후회할짓이면 안하고 안할짓이면 하고 그런답니다. 근데 또 재미있는건 뭔지 알아요? 아무리 계산을 해도 후회 할짓인데 후회 안하기도 하고, 후회 안할짓인데 후회하기도 한다는 거에요. 난 무쟈게 고민하는데 결국 아무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그냥 정신을 놓고 살기도 해요. 근데 잘 안되나봐요. 애초에 처음부터 정신을 놓고 사는 사람들이 참 부러울때가 있었어요. 마치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가 졸부들을 보는 기분? 하지만 안부러워하려고 노력중이에요. 왜냐하면 졸부들은 싸가지가 없으니까요. 난 착하기 때문에 후회를 하더라도 생각을 많이 할꺼에요.

 

  생각을 하는건 즐거워요. 무엇이 맞는지 무엇이 틀린지 판단해 볼 수 있거든요. 내 기억력은 괜찮은 편이라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을 총 동원하면 꽤나 괜찮은 생각으로 귀결이 되요.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이라고 부르곤 하죠. 하지만 대부분 짧은 시간의 경험은 인정해 주질 않아요. 그래서 난 언제나 신뢰를 받지 못하죠. 끝까지 의문을 제기하고 끝까지 믿으려 하지 않아요. 그러다 내가 옳다고 결정이 나면 그때는 원래 그런거구나 하고 넘어가 버리지요. 조금은 속상할때도 있지만, 내 업보인걸 어쩌겠어요. 난 그렇게 잘난대로 살다보면, 나도 경험의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잘 될꺼라 믿고 있어요. 솔직히 이건 걱정이 되는일은 아니에요. 후회하지도 않을꺼에요.

 

  사실 이거 말고 걱정이 되는 일이 있죠. 경험도 많고 시간도 긴데 잘 못하는 일이에요. 남들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죠. 내가 볼땐 아닌데 말이에요.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고도 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생각을 너무 안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어요. 언제나 밀어붙이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중히 고민해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죠. 난 생각을 하고 경험을 해서 판단을 하고 싶은데 전혀 할수가 없어요. 내가 결론지은 수십번의 판단 모두 후회해버렸어요.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은 순간은 없죠. 생각없이 살아도 후회했고 생각하고 살아도 후회해요. 경험이 적은 옛날에도, 경험이 많은 지금도 난 언제나 후회를 하죠. 하지만 되둘릴 순 없어요. 시간파리는 바람을 좋아하니까요.

 

  또 재미있는거 하나 알려 드릴까요? 경험도 없고 생각도 안하는 수많은 내 친구들은 언제나 후회하질 않죠. 대단해요! 친구들을 보고있자면 존경심이 들어요. 그들은 거만하죠. 후회하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당당하고 나를 깔아 뭉게곤 해요. 근데 난 할말이 없어요. 난 후회하는 위치니까요. 그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해주면 난 또 생각을 해요. 그러고 행동을 하죠. 물론 곧 후회하게 된답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다시한번 조롱해요. 처음에는 참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순리가 이렇다고 느끼는 순간 난 부끄럽지 않았어요. 아 내가 이런거구나 싶으면서 살죠. 그래도 후회는 해요. 후회할만 하죠. 왜? 또 후회해 버렸으니까.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말이래요. 난 어느새 그 말에 순응을 했죠. 근데 모르겠어요. 연습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들을 잊고 사는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후회해서 잃게 되는 것들은 정말이지 참을수가 없어요. 연습장은 찢어 버릴 수 있지만 교과서는 찢어 버릴 순 없잖아요? 난 욕심이 많은데 맨날 교과서 한권씩 버리자니 정말 참을수가 없어요. 왠지 이번에는 한번에 두권을 버린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죠. 먹물바닥에 버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또 모를 일이에요. 나는 던질때도 조심스럽게 던지지만, 어느새 내 책들은 재활용조차 못하도록 쓰레기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난 공부를 할수가 없어요!

필기도 안해놨는데. 이런, 망할. 이렇게 욕을 하고 난 또 후회를 해요. 왜 욕을 했을까. 그러고 할일이 없으니 다른 교과서를 또 사버려요. 인제 돈도 별로 없는데 큰일이에요.

 

  편하게 살고싶어요. 후회 안하고 살고 싶어요. 잘살고 싶은데 다들 욕심이래요. 부자가 되고싶은거도 아닌데 말이죠. 내가 가진거 한푼 없는 무일푼이라면 욕심을 부리는 게 맞을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나는 무일푼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아니라 그러는데 전 맞는거 같아요. 그래서 어쩔줄을 모르겠어요. 양반집안 장남인데 어께를 못피고 다녀요. 제사는 안지낼꺼지만, 그렇다고 조상님이 내 어께에 눌러 앉아계실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농담이에요) (아! 제사 안지내는건 농담이 아니에요) 아무튼, 난 빨리 시간이 지나가버렸음 좋겠어요. 시간이 약이라는데 말이죠. 내성은 안생겼으면 좋겠는데.

by 태방 2008. 3. 5. 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