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nogari9/100051644824

세상은 모조리 뒤바뀌어 있었다. 한쪽의 작은 웅덩이에서 나온 나는 터질듯한 계란껍질을 드디어 박차고 더럽디 더러운 하수구 밖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사람은 머리가 모두 돌아가 있었고 발가락은 썩어 문들어져 있었다. 결국 모자를 벗고 양말을 벗으면 다들 그런 쓸데없는 인간들 뿐이다. 태어나서 한번도 빨지 않은 더럽디 더러운 옷을 끝까지 입고 있었다. 뱃살은 줄었지만 내 인성의 살을 미친듯이 찌워내는 4주간의 기간동안 다시 입으려고 들었던 옷을 입을수가 없어 찢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 새롭게 등장했다

  뇌하수체에 이상이 생긴 말단 비대증 환자처럼 정신없이 비정상적으로 나는 나를 폭발시켰다. 본디 세상은 누구에게나 공평한듯 불공평하여 둥글지 못한 인간에게 가차없는 총알 세례를 남기곤 한다. 이 사회의 평균을 내고 그 중심점에 서지 못한 인간들에게는 영락없는 얼차려가 주어진다. 열외된 인간은 그렇게 패배자로 땅 찌끄러기에 묻어버리고 만다. 비정상의 궤도를 달려가면서도 나는 내 길이 정상궤도라고 인식하는 오류를 수십년간 범해왔다. 그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이었고, 비정상인 나에게 세상은 기분 더러운 핏자국을 선물하였다. 아무도 없는 산등성이에서 나오지도 않는 감기 바이러스들을 뱉는다고 10만년 같은 10분의 헛구역질을 해대었을때, 기다려주지않는 세상에게 지리멸렬 궁상떠는 일은 아무 쓸모가 없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아무 의미없는, 그것도 매우 불공정한 대우는 너무나도 끔찍하여 기억하기도 싫었던 10년전의 쓰레기같은 기억마져 꺼내버렸다. 억새풀 세개의 한마디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거다' 그래 니말대로 느꼈다. 그것도 처절하게 느꼈다. 잘살건 못살건 버려진 인간은 그 누구도 구제해주지 않는다. 질질짜고 벌벌 기어봤자 '병신'이라고 욕만 들어먹을 뿐이다. 그래 알겠다. 내가 나쁜놈이지. 누굴 욕하겠냐. 착한척 웃는척 그렇게 샤방샤방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다. 더러운 피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모기인간들에게 모기약을 뿌릴 생각을 안한 내가 잘못이었다. 깨끗한 세포들이 모여 만든 더러운 인간사회. 그 사회속에서 빌어먹을 병신 하나는 깨끗한 세포만큼 깨끗한 인생들을 찾아다니는 그 누구도 하지않는 헛짓거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고, 결국 결론은 하나의 새로운 낙오자를 만드는거로 종결이 되어 버렸다.

 

  새롭게 바라본 세상은 이기적인 사실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모두 결국은 이기적일 뿐이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 장발장도 죄인이고, 배불러도 빵을훔치는 정신병자도 죄인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다. 하지만 경찰은 없다. 남들은 죄인이고 나는 경찰이다. 자력갱생의 희망은 불가능하다. 넘의 인생을 고쳐주는 사람은 모두 '니가 뭔데' 소리를 들을 뿐이요, 지 인생 제대로 못가는 사람도 '난 좀짱'이라는 말만 되뇌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죄인이라 욕하면서 나 자신은 구치소 근처에도 가지 않을꺼라고 자신하는 이 바보같은 인간들, 그 속에서 난 준법정신이 세상을 살린다고 말하는 영생교 사이비 교주에 불과하다. 다들 그렇게 세상을 미쳐 날뛰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 진짜 정신병자는 아무도 없다. 베로니카가 땅을 치고 분노할 미친놈들의 세상. 난 정신병원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넘들에겐 죄를 진 인간이지만, 정신병원의 사람들이 진짜 정상인들인임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세상의 문명넘들은 오늘도 쥐꼬리를 뜯으면서 누가 쥐를 먹었느냐고 아웅다웅만 하고 있을 것이다.

 

  지리멸렬했다. 말이 좀 많으면 아는척한다고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과 함께하면 걸리적 거린다고 밀려버린다. 열심히 하면 뭣하러 열심히 하냐고 구박을 받는다. 혼자 지내면 똥폼잡는다고 쿠사리 먹는다. 옳은것을 이야기 하면 너 잘났다고 콧방귀를 낀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니 주제를 알라고 면박을 먹는다. 부정을 탄식하면 남 험담하기 좋아한다며 오해를 산다. 그렇게 사람들은 개같은 것을 따르면서 양같은 것들은 멀리한다. 그 속에서 나는 영생교 교주 노릇을 한다고 고생좀 했다. 바보천치들의 앞잡이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어느새 물거품이 되었다. 순결? 내 평생 지킬 수 있을꺼라는, 아니 내 평생 변하기 힘들꺼라고 생각했던 순진무구청명의 색은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변질되기 시작했다. 물감통의 투명한 물을 수업시간 내내 더럽히지 않는다고 고생좀 했다. 갈색을 칠한 붓을 살짝 담궈 버리는 순간, 물통의 물은 이미 똥물이 되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벽에 똥칠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마 둥글둥글 둥근척 하면서 넘들 똥칠하는 모습 구경이나 하며 살겠지. 똥으로 세계지도를 그린 놈들은 아무것도 못한 나를 보고 마구 비난을 해댈것이다. 넌 능력이 그거밖에 안되서 그러고 사냐고. 뭐 상관없다. 난 어짜피 이렇게 살아갈 운명인것을. 바뀌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주변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정신병동 동기들과 재미있게 수다떨고, 주사 놓으러 온 간호사와 친해지기도 하고, 의사들이 예의주시하며 바라볼 내 일기장에다가 문명넘들은 이해할 수 없는 환상적인 세상의 이치들을 기록하기만 하면 된다. 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무도 모르는 것을 나만 알고있는 이 기쁨. 밖에서 자신이 미치지 않았구나를 깨닫고 들어오게 될 다음 병동의 예비환자들에게 내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면 그만이다. 세상은 여전히 나를 마루타 삼아 마약도 넣어보고 전기 충격도 가해보고 하겠지만, 이미 난 강해질대로 강해진 사이어인이 되어있다. 슈웅. 하늘을 날수도 있고 에네르기파도 쏠 수 있는 내 대단한 능력은 만화책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뭐 그래도 아쉽진 않다. 세상의 모든 것들의 색이 바뀌어도 내가 서식하고 있는 이 정신병동은 모든것이 깨끗한 하얀색이니 말이다. 내가 잘났건 못났건 그 어떤것도 미련갖지 않는다. 내 주변의 모든것들이 하얗다는것 만으로 이미 병원의 모든 미친분들은 너무나도 행복하다.

by 태방 2008. 6. 1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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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달인? 배스와 쏘가리 구분도 못해”

한겨레 | 기사입력 2008.06.03 15:51 | 최종수정 2008.06.03 16:21

50대 남성, 대전지역 인기기사


[한겨레] 작가 이외수의 '뼈 있는 한마디'
이외수 "그걸 알고도 월척 기다리며 매운탕 준비"
"도덕이 경제보다 더 중요…촛불시위 가슴 뭉클"


작가 이외수(62·사진)씨는 최근 호를 하나 얻었다. '격외옹'(格外翁). 세상 격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늙은이란 뜻이다. 류근 시인이 지어줬다는데 무척 맘에 든다고 했다. 5월 끝자락,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자택에서 만난 그는 지난해 12월17일 40년 넘게 하루 여덟 갑까지 피우던 담배를 끊은 사연으로 말문을 텄다.

"참 걸판지게 살았는데, 대표작이 뭐냐 누가 물으면 마땅히 답할 게 없는 거예요. 담배를 끊고 몸을 좀 지켜야겠다, 그래서 끊었는데 100일 뒤 금단현상이 왔어요. 호흡이 가빠지고 설사하면서 발작 가까운 증세가 왔어요. 의사가 왕진 와 보더니 패혈증세라며 놔두면 죽는다고 해요. 얼마 전 퇴원했어요."

  그는 어떤 작품을 더 쓰고 싶냐는 물음에 "읽고 나면 오래도록 행복해지는 작품, 행복한 여운이 남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가슴 아린 작품들을 많이 썼어요. 아마 살아온 환경 탓이 크겠죠. 근데 이젠 진짜 좋은 예술 작품을 쓰고 싶어요. 행복을 주는 그런 것 …."

  "예술이 이젠 인간 사회의 진보에 기여해야 할 때"
   그는 "인간이 진화가 가장 더딘 것 같다"며 "새나 나무나 산이나 주변의 자연은 평화로운데 오직 인간만은 탐욕과 부조리 탓에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예술이 이젠 인간 사회의 진보에 기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며 "자연과 어울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왜 못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작가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낚시의 달인처럼 행세하던 놈이 막상 강에 나가니까 배스와 쏘가리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어떤 멍청이들은 그놈이 월척을 낚아 올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한 채 매운탕을 끓일 준비를 한다 …."

  무슨 의도가 있는지 궁금했다. "의도는 무슨 …. 요즘 진실을 보는 눈이 많이 실명된 것 같아요. 도덕을 무시해도 경제만 살리면 되는 것인가? 깊이 새겨보지 않고 주사위만 던지면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안론'(四眼論)을 꺼냈다. "사람들은 육안·뇌안·심안·영안 이렇게 네 눈이 있어요. 그런데 육안과 뇌안만 갖고 보니까 진실을 제대로 못 보고 왜곡하게 되지요.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크게 떠야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데 …."

  요즘 어린 학생들까지 촛불시위에 나서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인터넷 중계되는 거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그런데 그건 촛불문화제 같은 것 아닌가요? 촛불시위는 투쟁 방식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거든요. 민의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는 게 지금 정부가 할 일이지요. '정선아리랑'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진흙 속 저 연꽃 곱기도 하지~' 세상 탓 많이들 하지만 스스로 양심을 간직하면 연꽃처럼 맑을 수 있거든요. 양심과 도덕을 회복하는 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선거 때는 경제가 도덕보다 더 중요했을지 몰라도 이젠 도덕이 경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다리 부러진 제비에 공감한 흥부처럼 정치도 그렇게"
   1972년 < 견습 어린이들 > 로 등단한 이래 다작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까닭에 그의 집에는 요즘도 한 달이면 250명 정도의 독자들이 다녀간다. 마침 화천군에서 주변 일대를 '감성마을'로 지정해 요즘 공사도 한창이다. "흥부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의 아픔에 공감을 했던 거고, 놀부는 성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렸으니 공감이 될 리 없었던 거죠. 제비 따로 놀부 따로였던 셈입니다. 정치도 국민 처지에서 공감하고 일체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의 글을 빌려 요즘 심경을 물었다. "글은 외로워야 더 잘 써집니다. 우주의 주체인 인간이 어디까지 더 외로워야 하나, 그런 물음을 갖게 됩니다. 깨달음과 수행을 겸비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거지요. 속세와 인연을 끊으면서, 스스로 존재를 지워가는 것, 산중으로 산중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상처가 하나 생길 때마다 꽃 한송이가 피어난다'는 글귀를 빌어 연예담도 살짝 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학연·지연 공화국에 살고 있지 않나요? 지난해 떠나신 선친이 군인이셔서 하도 옮겨 다녀 내겐 지연도 없고, 대학도 돈이 없어 한 학기 다니고 돈 벌려고 또 쉬고 하다 보니 학연도 없어요. 여성들이 좋은 학교 나오고 집안 좋고, 잘 생기고 키 크고 그런 남자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난 해당사항이 전무이니 연애에선 실패 아니면 짝사랑이었죠."

  그는 독특한 머리스타일로도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대학 1학년부터 머리를 길렀어요. 유신 때 머리 깎이기도 했는데, 몇 년 전부터 머리를 따니까 성가시던 게 가시고 조금 깔끔해 보여요. 집사람이 빗어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물을 마시려는데 새가 그려진 머그잔이 눈에 들어왔다. 선친이 홍대 미대를 보내주지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의 그림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글귀도 함께 새겨져 있다. '기쁜 일만 그대에게.' 이외수답다.화천/글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동영상 은지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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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8. 6. 3. 20:09
http://blog.naver.com/nogari9/100051412438

아픈만큼 성숙하기도 하지만

아픔은 이내 적응되기도 한다


실무율의 원칙

지금의 고통보다 더 강한 고통이 없이는

고통을 느낄수가 없다

그렇게 인간은 고통속을 적응해 간다


주기는 짧아지고 고통은 커져간다

긴 시간의 휴식 없이 그렇게 계속되는 지속적인 슬픔

이제는 어느덧 그 슬픔을 혼자 삼켜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극한의 참을성, 그것이 주는 스트레스는

마치 물집잡힌 발로 끝없이 걷다보면 물집이 느껴지지 않듯

그렇게 갈수록 커져가는 스트레스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몸에 익어버린 이 느낌 이 기분

조금 답답하고 짜증날뿐 견딜만 해


기다림의 미학은 나에게는 사치일 뿐이다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서 기다림을 앗아갔다

기다림을 앗아간다는 말은 곧 희망을 앗아간다는 말과 같다

수많은 고통, 그중 희망을 앗아가는 고통이 제일 힘들다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만 끝나는 고통

마지막 한가닥의 실을 놓는 그 순간까지 그 고통은 지속된다

가위도 없고 라이터도 없다

내가 스스로 살갗을 찢어가며 이를 악물어 가며 뜯어내야 하는 희망의 끈

질기고 질긴 끈은 스스로 뜯지 않으면 내 심장을 뜯어간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를 살려내기 위해

내 스스로 뜯어내는 모진 끈들

사실 솔직히 그 고통을 이겨내 보겠다는 욕심을 내 보지도 않았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었다

없을만도 하다, 심장을 뜯어내는 불가능의 고통을 버텨내는것도 고역인데

그렇게 뜯겨진채로 수날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내 머릿속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계산법

이 고통을 이겨내기 전에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느꼈기에 시도해보지 못했던 결말

그 결말은 나를 현실도피로 만들었고

거짓되지않은 거짓감정을 만들기도 하였고

구호품을 받기위해 트럭뒤를 쫒아다니는 난민의 모습으로 나를 구겨버렸다


자학과 고통속의 나날들

배터지듯 먹고 다시 토해내는 거식증 환자의 모습

물론 절대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바보같지만 끝까지 도전하고 도전하고

바보같지만 끝까지 부딫치고 부딫치고

바보같지만


그러다가 절대 견뎌낼 수 없을것 같았던 내 심장의 혈관들에는

어느새 상처가 만들어낸 흉터들과 무뎌진 신경들이

상상할수도 없었던 새로운 도전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도 바보같은 도전

결국 또 실패할 확률이 높은 도전

내가 가진 고통의 기억들을 모두 합종한 고통들을

오랜시간 기다려야 하는 도전

그만큼 가치있는 영혼이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정말 다시한번 눈을 감고

조용히 새로운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한다


나를 완전히 버리는 새로운 여행


나를 세뇌하고 있다

나를 뜯어내고 있다

나를 개혁하고 있다

그래야만 버텨낼 수 있는 고통

상처 없이 가시밭길을 지나가고

뗏목 없이 바다를 건너가는 일

생소하지만 그만큼 가치있을거라 생각하는 일


하지만 먼길을 돌아 도착점에 도착하게 되면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을 맞이할 수있을거라는

또다시 바보같은 믿음


바보같지 않은 바보가

심장의 끈을 말 고삐에 걸고

죽지 않을 만큼 피를 흘려가며

끝이 없는 길을 힘차게 달려간다

by 태방 2008. 6. 2. 23:46
http://blog.naver.com/nogari9/100051299138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by 태방 2008. 5. 30. 22:59
http://blog.naver.com/nogari9/100049677098

총선이 끝났습니다. 10년만에 완전히 다른 세력에게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을 부여한 국민들은 앞으로 4년간 지금과는 완전 다른 정치 이야기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기간을 살펴보면서 국민이 얼마나 정치를 모르는지, 정치가 얼마나 국민을 모르는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던것 같습니다. 지나버린 참여정부 5년을 보내면서, 새롭게 시작될 이명박정부 5년을 맞이하면서 정치인과 국민이 어떠한 이야기들을 나눠야 할지, 어떠한 이야기들이 필요할지에 대해 몇자 간단히 적어볼까 합니다. (두서없이 적으니 꼬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러히 넘어가주셨으면 합니다.)


1. 수구보수세력, 조금만 살펴봐도 기대할게 없다


  한나라당 153석, 자유선진당 18석, 친박연대 14석. 불과 1년전만 하더라도 궂이 계파를 나누지 않고도 모두 한나라당의 깃발아래 있던 의석이 총 185석입니다. 무소속 연대까지 합하면 200석을 넘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라고 하는데요. 사실상 국민의 엄중한 감시가 있지 않는 이상, 의회민주주의의 구조상 절대 권력을 가진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었습니다. 총선이 끝난 다음날 대운하 특별 위원회 설치 기사를 보고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것을 좋아하게 된 국민들이 더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이 상황을 염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딱 20년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세력이었습니다. 그것도 생사람을 잡고 고문하고 죽이는 세력이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국민들에게 총을 쏘는 정치세력, 맘껏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노래할 권리를 없애기 위해 물고문을 하는 정치세력. 우리가 궂이 민주화의 이름을 가져오지 않아도 그들은 국민을 국민으로 안보는 권력만을 탐욕하는 그런 국민의 반역자 들이었습니다.


  그러고 20년이 흘러 우리나라는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글을 마음껏 인터넷에 올릴 수도 있고, 원하는 책들을 마음껏 서점에서 사 볼수도 있으며, 내 한몸 당당히 끌고 다니며 하고 싶은 일들은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되는 동안 수구 보수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여를 했을까요? 민주화가 일어난 87년 이후에도 그들은 굳건히 민주주의를 없애고 자신들 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만가지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도 참으로 꾸준히 단 한번도 어기지 말고 말이지요.


  얼마전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하는 유행어가 돌아다녔습니다. 국민들이 정치인의 도덕성에 신경을 안쓴다는 것을 풍자한 유행어 인데요. 국민들은 도덕성을 하찮게 보지는 않습니다. 참여정부 수많은 장관 낙마자들은 죄다 도덕성 문제로 낙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이 되고, 성추행을 한 의원이 당당히 의원으로 나오게 될까요? 뒷돈 돌리고 유언비어 퍼트리며 패싸움하고 욕하고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당당히 국회를 걸어다닐 수 있을 까요?


  국민들이 도덕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어떤 기준도 정치적 판단의 틀 안에 넣지 않은 것입니다. 왜요? 정치가 싫기 때문에죠. 싫은건 그냥 싫은거지 이유가 있어 싫은게 아닙니다. 이제는 도덕성이건 뭐건 다 싫으니 나한테 좀 잘할것 같은 사람이나 뽑아보자는 것이지요. 정치는 사회의 산물이고 사회는 국민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정치가 답답하니 사회를 버리고, 결국 사회 없는 나 개인의 이기주의에 맞는 정치인만 뽑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이번 수구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후 사상 유래가 없는 강력한 권력을 다시 확보하고 정계에 당당히 여당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정치가 신물난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구 보수세력이 원하던 일이었습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강압적 통치를 하던 일본이 더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하에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된 시기가 있습니다. 문화통치시기에는 반발하는 놈을 때려잡는 식의 강압통치를 벗어나 민족 고유성을 말살하고 경제적인 부흥의 기회를 철저하게 막아냄으로서 그들이 반발할 힘조차 만들지 않기 위한 통치입니다. 결론적으로 실패한 통치방식이기는 하지만 지금 수구보수세력은 그 방식을 한층 업그레이드 하여, 그대로 과거의 독재시절 국민현혹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자신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스스로 지지합니다. 아니 지지하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신경 안쓰는 사람들을 늘게 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지요. 국민이 주인인데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하는 순간 문지키는 개가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개가 맨날 키우던 닭을 물어뜯고, 집안 곳곳에 똥칠을 하고, 손님에게 으르렁 거리며 말썽만 피우는 개라면 그 집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을까요? 아무리 주인이 집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런 개만 한마리 집에 덜렁 내버려 두는것과 아닌것이 정말 큰 차이가 없는 것일까요? 한나라당을 포함한 수구세력은 이미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정치인으로서의 상식을 완전히 지워버린 집단입니다. 수구세력이 저지른 일들을 하나하나씩 살펴보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 국민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집단인가에 대해 치명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국민이 도덕성을 포기해버린것이 아닌, 정치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정치를 포기하지 않으면 도덕성은 포기를 할 수 없는 가치 입니다. 국민들은 참여정부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비록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의 호도가 과하긴 했지만) 장관들의 사소한 도덕성 흠결에도 강한 여론을 만들어 낙마시켰습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여당을 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못난 모습까지도 숨기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이 정치 자체에 등돌리게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똑같다는 말을 반복하고 되뇌이는 동안 국민들은 그 사실을 자연스레 믿어버리고 '그래 정치따위 망하면 어때 내 인생이나 잘 살면 되지'하는 정신만 남아 서울경기 오만 뉴타운 공약에 한 표를 던지는 기가막힌 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문제는 워낙 복잡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국민에게 민주주의관련 교육체계가 전무한것, 보수언론의 비균등적인 점유율, 신자유주의 확대를 통한 국민들의 탈정치화, 중앙집중형 사회에서 1등만을 꿈꾸는 사회 분위기 등 다양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당신이 조금만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수구세력의 어쩔 수 없는 도덕성의 흠결, 친일 세력의 기득권유지를 위한 만행들, 절대권력과 독재를 열망하는 권력욕의 집단, 비민주적인 국민을 보는 시각,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 거짓과 편법의 만행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세력이 정치를 하게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국민의 역할이지만, 이미 국민들은 주인임을 포기한 상태이고, 결국 이번 총선의 결과로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4년간 그들은 자신이 얻어낸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오만 방자한 모습을 보일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것도 확실합니다. 과거 독재시대때는 총으로, 정치가 성숙하지 않았을때는 돈으로, 그리고 지금은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온갖 술수로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싶은 말만 듣는다고 합니다. 정치는 사회의 문제이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는 사회를 통해서 개인과 소통을 하지 개인대 개인으로 소통하지는 않습니다. 수구세력은 사회가 잘되는 방향, 나에게 유익한 사회가 되기위한 방향을 제시해 줄수 있는 세력은 아닙니다. 역사가 그러하였고, 현실도 그러합니다. 미래는 안그럴꺼라는 착각은 정말 우리가 듣고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절대 권력집단을 철저하게 지켜보고 감시할 수 있도록 오히려 지난 희망을 꿈꿨던 참여정부 시절보다 더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2. 정치인은 국민, 국민 오로지 국민뿐이어야 한다.


  수구세력을 실컷 까댔으니 잠시 민주화 세력도 비판을 해보고자 합니다.(양비론은 절대 원치 않은 방향이니 그렇게 받아들이진 마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전 민주당 지지자입니만 그닥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민주세력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중요한 정치세력중 하나입니다. 만약 대한독립을 우리 스스로 이루어 내었고, 그 노력에 큰 역할을 한 인물과 세력이 있다면, 아마 제헌국회는 그 세력들로 대부분 채워졌을 것이 당연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제2의 건국이라 할 만큼 정치적으로 대단한 성과이며, 민주세력이 그 역할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은 정말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앞의 글에서 민주주의가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의미가 조금 더 깊게 다가오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민주화 이후 첫 선거에서는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합니다. 그것도 독재세력의 앞잡이한테 빼앗기고 말죠. (사실상 노태우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봐도 무관합니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이 민주화가 국민들 가슴속에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되던게 되었고, 갇혀있던게 해방되었지만, 그 기쁨은 민주주의사상을 공부한 사람들만의 것이었고, 그것을 이겨내는대는 꼬박 1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민주화 10년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아마 민주세력은 '이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국민들의 가슴속에 담겨지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민주화 직후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는 동안 국민들은 정부와 언론의 현혹과 호도 속에 IMF라는 크나큰 경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익숙해져 있지만, 민주주의가 급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동안도 국민들은 그냥 그거 살만큼 살고 있었고, 민주화를 부르짖는 사람들만이 크나큰 희생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생이 국민들 모두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민주화 초창기에 민주세력이 집권에 실패함으로서 10년간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더욱 멀어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10년간 민주주의는 건실하게 성장하였고, (맘에 안드는 말이긴 하지만) '제도적 민주주의'는 여타 20세기 민주화가 된 국가중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민주세력은 처음 맞게된 여당에게는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았을 겁니다. 국민들을 상대하는 법, 국민들과 소통하는 법은 잊어버린채 민주화에 집중하다 현실 정치에 맞닥드리게 되었으니 정치는 잘했지만 국민과 친해지는데는 실패하게 됩니다. 다행이 국민의 정부 시기에는 국민과 친해지는데 익숙한 수구세력들과 민주세력이 조금 타협을 하며 지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반감을 사는것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전 지지율은 20%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거 전 보수세력에게는 엄청난 지지가 있었으며(국민이랑 친해지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반면 민주세력은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주었음에도 저조한 지지율로(정확히 민주화를 지지하는 지지율만큼) 선거전마다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도중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였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명패로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던 민주당에서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만들어 줄 것만 같은 이 정치 신인에게 국민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냅니다. 수구세력이 원하는 '정치는 다 똑같아' 패러다임에 국민의 정부와 민주당이 말려들어 가고 있을때 쯤, 국민들은 다시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보내게 됩니다. 정의, 진실, 민주주의를 원하는 정치 세력도 그와 함께했으며, 정의, 진실, 민주주의를 원하는 국민들도 그와 함께 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길 바라는 수많은 일반 시민들까지 그와 함께하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국민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국민들은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에게도 과반의회라는 확실한 선물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민주세력은 민주화 이후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했으며, 이 기득권이 그들을 스스로 좌초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민주화라는 훈장을 달고 권력의 맛에 들여 수구세력과 다를 바 없는 정치인들도 노무현 바람에 무임승차하여 열린우리당에 우후죽순 탑승하게 됩니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 국민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보다는 국민들을 속이는 법 부터 배우게 됩니다. 자신들끼리 계파를 만들고, 그걸로 서로 비방하고 싸우며 자리 싸움을 하고, 맘에 안드는 사람이면 무작정 반대하고 반목하는 일만 반복하게 합니다. 국민들은 노무현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냈지만 한발 나아가서 민주세력 자체에게도 지지를 보냈습니다. 왜? 자신들이 바라는 나라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말이지요.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선물을 보낸 보답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잘하라는 격려의 지지였습니다. 하지만 민주세력은 과거의 훈장에 갖혀, 미래의 노력에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게 됩니다.


  물론 정치개혁을 꿈꾸고,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새로 세워가기 위한 노력은 많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하였으며, 소위 친노라고 불리는 세력, 그리고 시민 사회 세력과 계파싸움에 떨어져 있던 당 내 비주류 세력들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내고 많은 목소리를 냈으며 그것을 통해 국민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소통은 번번히 수구세력을 통해 차단되었으며, 그 세력의 방해공작을 막아내는데에는 그들만으론 너무 힘이 부족하였습니다. 한데 뭉쳐도 모자란 이 상황에 기득권만 옹호하는 계파싸움은 열린우리당을 자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단결된 모습은 단 한번도 보이지 못한채 희망을 노래한 열린우리당은 해체되어 버리고, 민주세력은 국민들과 빠이빠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이미 뭘 해도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선후보였던 정동영후보는 계파싸움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으며(차라리 이해찬씨나 유시민씨가 나왔더라면 진검승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선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지요.) 당의 재정비과정에서 민주세력대통합의 감동과 진정성은 온데간데 없이 똑같은 계파싸움만 반복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미 패배는 확정이었습니다. 단 부활의 가능성이 있냐 없냐만이 남았습니다.

  이미 총선에서 그들은 심판아닌 심판을 받았습니다. 국민은 수구세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비례대표 지지로 보여주었지만, 너네 인물로는 안된다는 것을 지역구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일단 ‘정권 잡으면 좋은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는 이미지는 민주화 20년이 지난 지금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는 철저히 민주세력 스스로의 잘못입니다.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민주주의 사회가 아름다운 비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금뺏지 달고 한거라곤 자기네들끼리 싸움뿐이었고, 그 어떤 비전도, 희망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시나브로 민주세력은 정권을 뺏겨 버렸습니다.


  국민에게 준 선물은 국민들도 감사하게 잘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민주세력은 확고히 알아야 합니다. 한때 민주 세력이 민주개혁세력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민주, 개혁, 평화, 통일 이 네가지 단어가 언제나 함께 가길 원했던 민주세력은, 권력의 단맛앞에 모든 단어를 잃어버린채 껍데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자신들이 민주세력이라면,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국민들에게 민주 세력은 당당히 민주주의의 단맛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국민들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잡아내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통합민주당은 아무런 미래도 찾아볼 수 없는 정당이 될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미래입니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는 이릅니다. 원래 진정성이라는 것은 없다가도 생기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닌 가슴에 담겨져 있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총칼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았던 그 마음이 남아있다면, 수구세력의 여러 횡포에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을겁니다. 그들에게 국민의 한표로 좌절을 안겨준 만큼 그들이 건강한 야당으로 남아 현정권의 방향을 똑바로 잡아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것도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3. 국개론을 말하는 당신은 정치할 자격 없다


  이제 진보세력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진보세력은 깔게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글은 그런 분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니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셨으면 합니다. ^^; 실제로 진보세력은 지난 5년의 기회(민주세력보다는 짧은 기회이지만)에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고, 이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의석에 철저히 반영되었습니다.


  지난 17대 총선은 대한민국 정치역사의 많은 변화를 남긴 선거였습니다. 특히 진보세력의 원내 진출은 가히 새로운 정치를 만나볼 수 있었던 대한민국 국민들과 대한민국 사회에게는 크나큰 기회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대단한 성과였습니다. 앞서 말한것 처럼 국민들은 17대 총선을 통해서 새로운 정치의,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원했습니다. 이는 열린우리당의 정당지지율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정당지지율까지 함께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고, 과거 수십년간 단 한번도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진보세력은 단 1년만에 국민의 7명중 한명은 그들을 지지하게 하는 성과를 얻어내게 됩니다.


  진보의 가치는 다양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할 가치, 인간이라면 누려야할 것들을 모자람 없이 누려야 하는 가치, 사회의 옳은 방향을 위해서 항상 협력하고 함께하는 공동체의 가치, 사민주의적 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가치들을 정치 전면에 내세울 기회를 얻었으며, 의회 내에서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가치를 정당을 통해 실현시키는데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은 진보라는 말을 곧잘 익숙하게 사용할 줄 알게 됩니다. 진보세력이 정치권에서 지난 5년간 이정도 해낸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성과입니다. 진보세력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들의 역할에 짝짝짝 박수를 보내는데는 아낌이 없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이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진보세력 전체가 자신들이 정치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진보의 가치는 정말 좋은 가치들입니다. 하지만 그냥 살아가면서 평범하게 느끼기에는 너무나 힘든 가치입니다. 사람은 평등이 좋은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지만, 알게 모르게 인간과 인간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빵 한조각을 열조각으로 불려 만들어 다섯이 나눠먹으면 한사람당 두조각이 돌아온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당장에 다른 다섯의 빵을 뺏는 것이 나에게는 더 이익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한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러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척박하고 현실은 너무나 냉혹합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이상을 노래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자 하는 진보 세력은 정말 소중한 정치 세력이지만, 정치는 노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보세력은 너무 늦게 알아버렸습니다.


  옳은 이야기를 하면 옳게 들어주리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은 오만가지 해석을 붙이며, 그 해석은 오만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아니 오해가 아니더라도 들어줄지 조차 의문입니다. 진보세력은 좋은 이야기를 외치는것에만 머물러 버렸습니다. 그들의 수장격인 진보세력의 국회의원들은 그런 것들을 유들있게 국민들과 나누는 것은 하지 못하고, 일반 진보세력 지지자들이 하는 일과는 별 다를바 없는 일들만 진행했습니다. 시위, 데모할때 대빵은 시위대의 앞잡이입니다. 하지만 의회에서는 국민들과 이야기 잘하는 사람이 대빵입니다. 국민이 주인이고 의원이 하수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위대 앞잡이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국민들이 진보란 단어만 알지 진보가 뭔진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 내며 희망이고 뭐고 기대하기도 전에 권력을 다시 회수해 버렸습니다.


  뭐 5년밖에 안된 진보정치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것 아니냐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쓴소리를 멈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로 요즘 등장하고 있는 국개론 때문입니다.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소위 국민이 개XX다라는 말입니다. 진보가 좋고 진보가 옳은건데 국민이 머리가 나빠서 이를 모른다. 그러니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자멸로 몰아갈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말던 우리는 진보가 옳으니 진보를 주장하자라는 그런 논리가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최근에 안거라 이보다 더 긴 의미를 상세히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시는 분은 추가 설명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이 논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국민이 개라니요? 국민은 엄연히 주인입니다. 주인이 자기 다리를 다치건, 주인이 배탈이 나건 그건 주인의 몫입니다. 내가 다리를 다쳤다고 내 다리가 내것이 아닌건 아닙니다.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면, 사회의 발전을 꿈꾸는 사람이면,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 정치권력의 근본인 국민을 욕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니들은 바보니 니들이 이렇게 한거 아니냐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국민이다라는 모순점을 빼고서라도, 정치인은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해야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너무나도 위배되는 사고입니다. 서로간의 의견 갈등이 있고 이를 해결해 나감으로서 차근차근 발전을 하고, 현실과도 타협하고 그 와중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한 이성적 사고와 토론, 협의를 통해 이끌어 나가야 하는 민주주의 체제하에 국민이 개라니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진보 정치세력이 국개론을 핀다는 말은 아닙니다. (엄밀히 진보정치세력은 민주세력과 문제점이 조금은 유사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약간 방향은 다르긴 합니다만) 하지만 진보를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국개론을 외치며 민중을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도매급 취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안타깝고,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국민들이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정치는 철저하게 국민을 상대로 현실을 뛰어다녀야 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작곡가는 곡을 쓰고, 미술가는 그림을 그리면 끝이지만, 정치인은 그 이상을 넘어 현실로 이상을 끌고 와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이 진정 진보적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진보적이지 못한 사회에 좀 더 관대해지고, 진보적이지 않는 현실을 좀 더 많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진보의 가치를 세상에 널리 뿌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거라 생각합니다.




4. 바람은 한순간이지만, 변화는 조용하다.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한명의 정치인과 국민들에게 던지는 메세지입니다. 한명의 정치인은 요즘 소위 뜨고있는? 문국현 (이제 의원님이군요)씨 입니다. 2,30대에게 문국현 바람은 상당한 이슈를 불러 일으킨것이 사실입니다. 회사에서도 이사님앞에서 문국현 신중론을 폈다가 엄청 혼났었답니다;; 그래도 짚고 넘어갈껀 가자는 마음에 욕먹을꺼 알면서도 한번 글을 던져봅니다 ^^;;


  우리는 과거 노무현 바람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 시켰을때 크나큰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제 진짜 새 세상이 오는구나, 구태 정치가 사라지고 새로운 정치가 눈앞에 등장하는구나. 모두 이런 열망과 바람을 가지고 국회의원을 하며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진,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부산에 홀홀단신 뛰어들어 고배를 마신, 그렇게 정치판에서 실컷 뒹굴다가 들어온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치인으로서의 대단한 가능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는 그리 큰 힘이 있던것도 아니었고, 노무현 대통령 혼자 세상을 뒤엎기에는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오만가지 개혁법안들은 거의 처리되지 못한채, 행정부의 내실 다지기에만 충실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일은 잘해놓고 국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한채 조금은 쓸쓸히(그래도 다른 전직 대통령들 보다는 화려하지만) 행정부의 수장 자리를 떠나가게 됩니다.


  국민들은 이러한 5년의 시간동안 두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교훈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만 남겨진 교훈이었습니다. 한가지는 희망을 가져봤자 바뀔게 없구나라는 교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노무현정도로는 세상이 바뀌지를 않겠구나라 하는 교훈입니다. 전자의 교훈은 한나라당 몰표를 만들어 주었고, 뒤의 교훈은 바로 문국현 바람을 불어오게 만듭니다.


  워낙에 복잡한 정치현실이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어떠한 일들을 겪으면서 개혁법안들을 처리하는데 실패했는지는 국민들이 세세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커다란 몇몇 이슈들만(한나라당이 만든 이슈들만) 머리속에 남아있고, 그것들을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함으로서, 결국 아무것도 한거 없이 떠난 식물 대통령이다. 결국 노무현도 다를바 없는 정치인이었다는 생각만 남기게 됩니다.


  이때쯤 그러한 이미지가 하나도 없이 순수한 모습의 한 인물이 정치계에 발을 들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정치계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말이지요. (이는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의 출발입니다.) 성공한 CEO, 노동자를 생각하는 기업가, 활동적인 사회운동을 겸하며 벌어들인 재산을 자신의 부의 축척에 이용하지 않는 이상적인 기업가. (정말 기업가로서 문국현씨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유한그룹은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업입니다.) 이런 기업의 CEO가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국민들은 제2의 노무현, 아니 노무현보다 더 나은 문국현을 기대하며 그에게 희망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문국현씨는 지금의 정치 세태에 맞게 딱 적절한 이미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도덕적인 CEO이미지뿐 아니라 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뻔한 정치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데에는 그가 시작이 정치인이었다는 점에 기인했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바닥의 지지를 가지고 있던 참여정부를 맹렬히 비판한점, 과거 정치인들과 손잡지 않고 독자행보를 나아간 점. 이런점들이 새로운 정치를 원했던 희망론자들의 가슴을 자극했으며, 그들을 소위 문빠로 만들게 되는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하지만 냉정히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서 문국현씨를 보면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정치초짜란 말은 자랑이 아닙니다. 정치는 현실이며, 국민들은 냉혹합니다. 정치인으로 살아왔던 노무현 대통령도 정치 술수에 말려 국민들의 반감을 산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정치경험이 전무한 사람이 대통령 되면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매일마다 두드려 맞을껀 뻔한 일입니다. 또 정치라는건 갈등과 타협의 기술, 사회 전반의 이해와 행정능력의 전문성, 외교능력과 인재관리능력등 다양한 능력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것들을 정치 신이에게 한번도 검증없이 일을 맞긴다는건 엄청난 도박이나 다름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참여정부 석고대죄론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수구보수세력이 주장하는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의견을 그들과 함께 주장한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고, 현실정치의 타협을 해내지 못하고 여권단일화에 실패하는 모습 역시 그가 생각은 좋지만 정치력은 바닥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1명이지만 국회의원은 300명이기에 그가 의원이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그런 인물이 정치적 경험을 얻을 기회를 얻은것은 대한민국의 국회에, 국민들에게는 큰 선물입니다. 하지만 과거 열린우리당 출신 초선 의원들이 현실정치에 당황해하며 쓴잔을 마신 점을 기억한다면, 이번 국회에서 그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가 정말 정치천재라면 한시즌만에 완벽히 적응해서 국회를 홍길동 처럼 휘저을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건 과거의 역사가 너무나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이런 현실이 다 세상이 더럽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이 정치이고 이것이 사회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만들어 모인 이 국가는 5천만의 생각이 다르고 5천만의 가치가 다르고 5천만의 희망이 다릅니다. 이들을 단 한명이 엮어내는 것도, 300명이 엮어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올바른 가치와, 다양한 정치경험과,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더해져야만이 겨우겨우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것이 정치이고 대한민국의 사회입니다. 문국현이라는 훌륭한 정치인을 얻게된 점에 대해서 밝게 미소를 지으셔도 좋지만, 그가 모든것을 바꾸어 낼것이라는 헛된 기대에는 눈물을 흘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야만 합니다. 나뿐 아니라 수천만의 유권자들의 생각 역시 중요하니까요. 또 그것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테니까요. 변화는 서서히 다가옵니다. 누구도 생각치 못한 시기에 말이지요. 하지만 그 변화는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은은한 향기라는 것도 알고 계셔야 합니다. 경제 살린다고 경제 안삽니다. 경제 죽었다고 망하지 않습니다. 정치 바꾸겠다고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고, 정치 썩었다고 당장 내일 전쟁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하지만 올바르게 국민들이 눈 똑바로 뜨고 살아가고 있으면 정치는 자연스레 희망의 빛을 내뿜게 될 것입니다. 그 빛을 만들어 가는 역할은 정치인이 해야하고 국민이 해야하고 우리 모두가 해야합니다. 앞으로 다음 지방선거까지 국민들이 할 일이라고는 열심히 사회를 들여다 보고 열심히 정치인들 들여다 보고 열심히 생각 많이하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정치가 없으면 나라도 없고 국민도 없습니다. 국민이 주인인 이 국가에서 우리 집안을 우리가 좀 더 돌봐야 미친개한테 집 안뺐기고 따스한 온돌방에서 잠 들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 더하여 이 사회에 관심갖는 주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국민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by 태방 2008. 4. 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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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잔을 마신채 무슨 이유인지 도망치는 문 밖으로 뛰쳐 나왔다. 무엇이 그리 성급했을까.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두려웠었다. 음악이 나오는 것이 두려웠었다. 누군가 청하게 될 예의바른 손이 두려웠었다. 그렇게 뛰쳐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너무도 좋아하는 그 공간에서 나는 그 어떤 즐거움도 견디지 못한채 그렇게 뛰쳐 나왔다.

  나와 바람을 쐬며 생각했다. 왜 나는 자꾸 도망다녀야 하는가? 왜 자꾸만 스스로를 힘없이 만들고 몰아 세워야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자꾸 위축되게 만들고 작아지게 하는가? 자신감 하나 빼놓으면 시체가 되는 나에게도 그렇게 자꾸만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 누구도 확신시켜 주지 않은, 그 누구도 확인해주지 않은 내 본모습을 알게될까봐 걱정하게 되어서, 그래서 자꾸만 나를 동굴 속으로 밀어 넣어놓고 멀지간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내모습. 그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볼때마다 난 비참함에 얼굴을 들지 못한다.


  아직도 기억난다. 중학교때 그 친구의 모습. 본성이 나쁘진 않았던거 같지만 못된짓을 많이 하고 다니던 그 친구. 어렸을적 공부도 못하고 나쁜짓을 하고 다니는 아이들을 볼때 '저 친구들은 커서 뭐가 될까'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하고 다니던 시절. 그 친구에게 난 얼굴을 맞대고 정면으로 나 스스로를 저 바닥까지 던져버려야 할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 친구의 죄가 아니다. 단지 우리 반 전체를 대표해서 그 친구가 말한것 뿐이다. 아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버려 나를 기분나쁘게 할 심산으로 뱉어버린 그저 그런 비난에 불가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철저하게 부시는 일에 몰두하였다. 미움 받을 수 있는 인간, 거절 받을 수 있는 인간, 파괴되어 버릴 수 있는 인간. 나는 그런 인간으로 아무도 모르게 십수년을 살아온 것이다. 나의 죄도 아니고 너의 죄도 아니지만, 그 죄인없는 판단은 나를 스스로 죄인으로 몰고갔다. 상대를 한순간이라도 기분나쁘게 하는 순간, 나는 몹쓸놈이었고 죽일놈이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았다. 웃음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어떤일이든지 할 것만 같았다. 내 심성이 어떤놈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단 한번의 남에게 들었던 그 비난 때문에 나는 나를 지구 끝까지 죄인으로 몰고가게 되는 버릇을 가지고야 말았다. 나쁜 버릇. 쓸모없는 버릇. 하지만 그래야만 내 인생을 근근히 버텨나갈 수 있었다.


  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는 정말로 대단한 장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상대에게 즐거운 느낌을 주고 나 역시 즐거운 느낌을 받아야만 한다. 남에게 주는 리드 하나하나에 항상 정성을 기울이고 헹여 실수하면 정중히 사과할 줄 아는 매너까지 갖출 수 있는 나는, 반면 춤을 처음 배우고자 할때 아직 내가 초보자라는 걱정이 앞서 춤을 추기 두려워 하고 손을 내밀기 꺼려 한다. 춤은 남자가 먼저 청하는 것이 예의인데, 솔직해 내가 내가 청하기 보다는 청을 받아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동호회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혼자서 뿌리치고 그렇게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 허무하다. 아쉽다. 하지만 이게 편하다. 도저히 그 공간안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춤을 청할것을 두려워 하고, 춤을 청 받았는데 실력이 안되 헹여 실수라도 하면 그 죄책감에 못이겨 스트레스를 받을 것을 두려워 하느니 도망치는게 낫다. 그러는게 낫다고 애써 위로하고 위로하고나면 밀려오는 그 허무함. 난 그 허무함에 또 다시 눈물짓는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뭐 어느 면에선 맞는 말이고 어느 면에선 틀린 말이랄까. 나는 내 능력에 대해 자신한다. 내가 맘 먹고 덤비면 못할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지겨워도 난 할 수 있으니까 계속 하다보면 잘 하게 되겠지라고 되뇌이며 끝까지 도전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사람 대하는 모든것들에 대해. 상대에게 행하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걱정되고 조심스러우며 무언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상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지 않으면 당황하고, 대응해 주지않으면 불안해 하며,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자꾸만 압박하곤 한다. 아니 이제 뭐 많이 극복한 편이긴 하다. 대학교 이후 사람을 두려워 했던 것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서(이 역시 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은 유들유들하게 그냥그렇게 사람 만나는데는 자신감이 조금 붙었다.


  물론 아직까지 딱 하나 만큼은 자신감을 되찾지 못하는 것이 있다.

by 태방 2008. 4. 3.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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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꺾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성적증명서를 떼보면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은 나를 '민주투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사와 검사, TV 아나운서와정부당국의 '나으리들'은 나를 일컬어 '좌경용공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붙여준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자리 없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실업자라고 나를 비난한다. 그렇다.나는 직장이 없다. 하지만 직업은 있다. 나는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 번역을 하거나 수필을 쓰고, 어떤 때는 드라마 대본이나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의 직업을 구태여 말하자면 '자유기고가'라 할 수 있다.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책도 하나 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나는 감옥에 두 번 갔다 온 전과자이지만 예비역 육군 병장이기도 하다.폭력전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폭력배는 아니다. 한번도 남을 때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계엄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적도 있지만 그 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군대생활 32개월 동안에도 영창 한번 간 일이 없는 모범 사병이었다.
 
나는별로 잘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 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 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 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나라. 이런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이런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감옥에 잡아 가두려고 한다. 계엄령 위반이니 폭력죄니 하는 내 전과는 그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 별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6월에 수백만 국민이 했던 일들에서 보듯 아주 많은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내가 나를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이렇게 살려는 뜻을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나름대로의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이런 생활에서 찾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나가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이듯이 나도 또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나라는 인간의'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단지, 지난 십 수  년간이 사회가 나와 이웃에게 가한 억압에 맞서싸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생활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출세욕을 품게 한 '가난뱅이 의식'
 
나는 2남 4녀 중의 차남이자 다섯째이다. 태어나서 10년은 경주에서, 고교 졸업까지 10년은 대구에서 자랐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그 분은 비록 "가슴에 달 금빛 훈장도타고 갈 황금 마차도 없는" 평교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먹였고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나는 '가난뱅이'였던 적이 없다. 밥이 없어서 굶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나는 주관적으로 가난을 몹시 심각하게 경험했다.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다. 미술시간이면 두꺼운스케치북과 포스터칼라를 꺼내놓은 친구들이 낱장 켄트지를 꺼내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조심스러웠고 외풍 센 먼지투성이 우리 집은 나로 하여금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 소년기의 대부분을어두움으로 뒤덮었다.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두 살 간격으로 늘어선 6남매. 내가 중 3일 때 큰 누님과 형은 더구나 사립대학을다니고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가계였다. 빚이 늘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전부터 집에 달린 점포에 잡화상을 차렸다. 매일 새벽 시내의 큰 시장에 나가서 생선과 야채를 받아오는 중노동 때문에 심장이 약한어머니는 늘 어딘가 편찮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고 오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고 그 헌신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가난과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화가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보고서 모른 척 지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그 뒤 며칠 동안 몹시 번민하고 자학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가난의 이유를 몰랐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왜 시장아줌마가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새 빚걱정에 한숨을 쉬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대구에서 경주로 학교를 옮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이확실할 분이었다.
 
나는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한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보건소에 가서 무료로 주는 알약을 타오곤 했다. 어머니가 그 알약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경주에서 토요일이면 오던 아버지가 가끔 일직 때문에 못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면 나는 밑반찬을 가지고 경주에 갔다. 아들에게 더운 밥을 먹이려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의문을 품었다. "하숙 대신 자취를 해서 도대체 얼마나 절약될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우는 적이 많았다.


그 때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하루빨리 법관이 되어야지"
 
나는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판사'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 가장 빨리 출세해서 부모님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장한 각오로 '판사'라고 대답하면 백부님이나 당숙들은 매우 기꺼워하였다. 하지만내 부모님께서 그런 대답을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누이들이 은근히 그런 결심을 부추겼을 분이다. 나는 소위'출세'라는 것을 하기 위해 '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사회적 욕구였다.



사회적 부조리의 첫경험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 같다. 자유니 정의니 하는 빛나는단어들을 책에서 배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단어들 때문에 가슴 설레거나 잠 못 이룬 적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될때까지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이제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저 신기하게 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출범했지만,그것 역시 다음해 국민윤리 교과서에 장황하게 서술된 '한국적 민주주의' 만큼이나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씨가 간첩으로 나오는 반공드라마를 들으면서도나는 일간신문에 기둥 만한 활자로 박혀 나오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학생회장 선거가 없어지고학도호국단이란 것이 생겼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던 우리 집에 아침마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정치권력의 언론자유 탄압에 비분강개하지는 않았다. 그건 드물게 재미있는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다. 정치경제교과서에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설명한 내용과 유신헌법 조문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었지만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것을 몽땅외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잡혀간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긴급조치의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75년 당시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하여 김상진이라는 서울대학생이 할복자결한 일까지 있었지만 내가긴급조치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등생'이었다. 중학교때보다는 성적이 훨씬 향상되어 선생님들로부터 일류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수한 고교평준화 1기생'이었던 것이다. 교실구석에서 박정희와 모모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속살거리거나,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사회선생님을당황하게 하는 친구들을 나는 경멸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학생이라면 학교공부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회라는 것'에 대해,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 상황이 나에게 닥쳐왔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처럼 닥쳐왔다.
 
나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받은 봉급을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 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잡았다. 어머니가 장사 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 준 아버지, 여섯 살 때부터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소외당한다는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 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오도된 반란 : 냉소주의
 
아버지의 봉급액수를 알게 된 순간 이후, 나는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지당하신 말씀'들 속에서 거짓의 냄새를 가려낼 수 있게되었다.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 사회교과서 전체를 지배한이런 조화론적 세계관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일뿐이었다.


그것을 사회적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느낀 가난에 대해 부모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근면하고 정직하며 힘껏 일하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부모님이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장래의희망을 법관으로 잡은 데 대한 회의가 싹텄다. 유신시대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타락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관을진심으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 권력에 가까이 있고 잘만 하면 한 재산 모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러워할뿐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나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학교생활도완전히 엉망이었다. 중고등학생 3천 명이 ㄱ자 4층 하나에 몽땅 수용된 학교. 도서실 좌석이 1백 석 남짓하고 그저 교사와학생들을 족쳐서 명문대학에 많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학교운영. 교사의 평균연령이 30세를 겨우 넘고, 서울의 강남지역에여학교를 짓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두운 교실에 형광들을 더 달아달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묵살하는 재단 측의 횡포.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러하듯 학생들의 인격 함양에 신경을 쓰기엔 선생님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었고, 오직 명문대학 진학에만 눈이 팔린 우등생을 만족시키기엔 젊은 선생님들의 경륜이 부족했다.


나는 학교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엔 아무 책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꺼내놓고 혼자 공부하거나 잠을 잤다. 방학중의 보충수업에는 한시간도 참석하지 않았고 예비고사가 끝난 후 두 달간은 학교에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성이 비뚤어진 우등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어느 정도는 비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과목당 몇 만원씩 내고학원강사들에게 그룹지도를 받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 대신 가게에 앉아 영어 참고서를 읽어야 했고,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수학때문에 고민하다가 최후수단으로 수학정석과 해법수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버려야 했다.


나는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는 척척 풀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문제를 푸는 선생님의 강의를 꼬박꼬박 듣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비뚤어진 우등생 쪽으로 끊임없이몰아댔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릎 꿇고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나의 정신세계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지나쳤다.


각박한 입시교육이 쳇바퀴 속에서 선생님도 나도 혹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법관이 된다는 데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흥미나 적성으로 보자면 역사학과 언어학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하지만 그건 별로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았다. 가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루 빨리 그것을벗어나려면 법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선생님도 한숨만 내쉴 뿐 이래라 저래라 권유하지 않았다. 나는괴로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열쇠를 찾아낸 후 고민을 덮어버렸다. 그 열쇠는바로 냉소주의였다.
 
세상은 어차피 불합리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다. 꼭 논리적으로 타당한 행동만 할 수는없다. 불합리해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지 않은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뒤로는 개수작해서 돈 벌어도 남 보기에 정승같이 쓰면 칭찬 받는다. 졸업식날까지는 술 담배하면 안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그때부턴 제 마음대로 아닌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해도 합격하면 영웅대접 받지만, 선생님 말씀꼬박꼬박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서 떨어지면 병신 소리 듣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저렇게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 세상에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란없는 거야.


정 역사학이 하고 싶으면 법관 하면서도 할 수 있을 꺼야.
 
나는 사회적으로용인되는 관습이나 규범을 진리 혹은 가치와 혼동했다. 겨우 열 아홉 살 촌뜨기 주제에 마치 인생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생각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교양서적도 읽지 않고 교과서 참고서만 팠으니 사고의 폭이란 것이벼룩의 간만큼 밖에 안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썼다. 법대와 경영대,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몽땅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법대를 지망한 나는 사회계열에 원서를 낸 것이다. 누구와도상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씀이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제안을하였다.


영어과를 가서 영어를 능통하게 쓸 수있게 된 후 다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동양사람은 서양을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만해서 동양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동양이란 고작 인도와 일본뿐이다. 그러고서 다 아는것처럼 만용을 부린다. 따라서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동양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선 서양어와 서양철학을전공한 후 다시 동양철학을 연구해서 훌륭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란 것이 아버지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속으로웃었다. "아버님, 그 많은 공부할 동안 제 학비는 누가 댑니까? 돈은 언제 벌어 부모님 편안히 모시구요? 아버님은 자식들의생각을 너무 모르십니다. 왜 자식 덕에 노후에 편안히 사실 생각은 안하십니까? 아버진 너무 이상주의자세요. 현실은 냉혹하지않습니까? 전 별로 판사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판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다음날 학교에나가 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무엇인가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슴 설레야 할 그 열 아홉의 나이에 나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나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고, 화랑 관창과 김유신의 생애를 들었으며, 어버지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지당하신 말씀'에 대한 정신적 반란의 싹을 틔웠다.


하지만 내 정신의 텃밭이 너무나 황폐하고, 입시공부라는 환경이 너무나 메말랐던 탓으로 그저항의 싹에서 돋아난 것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의 가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 대학 신입생 1년간은 사실상고등학교 4학년의 의미 밖에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학생활의 첫해 : 실망과 환멸의 시기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빡빡한 입시공부의 지옥에서 그야말로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대학생활" 속으로 내던져졌다. 남들처럼 나도대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학은 상아탑이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입시지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은 지성을 가둬놓는하나의 정신적인 감옥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귀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중년의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서 나는 대학이 풍기는감옥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학문은 현실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보면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학문인가 아니면 부조리와의 싸움인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부조리와의 싸움이라고 하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게 무서워 학문 쪽을택하려니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해서는 왜 안될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데모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그 말이야!"
 
좀 짜증 섞인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도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학에 다녀보지를 않아서요. 앞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면 그저 학문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되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호통과 훈계를 듣고 나서 나는 면접시험장을 나왔다. 같이입학하는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걱정을 해 주었다. 나도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실망이 그보다 훨씬 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질문을 한단 말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고 독립된 인격체인데,데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나 토론은 몰라도 하겠냐 말겠냐를 그렇게 다그치다니. 지성인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날의 실망과 회의는 다가올 숱한 환멸의 날들에 대한 하나의 암시오, 예고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그 숱한 의문들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며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캠퍼스잔디밭에서든 단지 몇 명이 모여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난해하고 심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것과는 별개였다.
 
경제학개론강의는 미적분 강의의 연장선이었다. 제한된 액수와 화폐를 가진 소비자가 그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소비지출을하는가. 일정액의 자본을 가진 생산자가 일정한 물가와 임금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장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떻게 자본과 노동을결합하는가? 경제학 교수는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방정식과 기하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가? 어째서 아무런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평생 어마어마한 소비를 하며 호의호식하는데 하루 10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죽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에속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게는 경제학이 매우 신비롭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게느껴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의주장을 다루었지만, 정치학 교수는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를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서 몇 년 씩 징역을 살리게 하는 긴급조치. 국민의 대표인국회의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인 이상한 현실. 그것을 연구하는것,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마저도 엄격히 금지된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정치학강의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철학개론 교수는 칸트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가르쳤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1978년 대한민국 청년학도가 칸트를 연구해야 하는지,칸트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빛과 희망을 주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른 이론들은 '난삽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의 강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골라잡기와 단답형 주관식문제를 풀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해야 했지만, 대학에서는 논문식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교수님의 강의와 교과서의 핵심적인 대목을한두 페이지에 걸쳐 몽땅 암기해야 했다. 차이는 그런 정도였다.
 
하나의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자유로운질문과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지닌 교과서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했다. 지금, 그리고이 땅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고뇌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는 모든 강의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룬 주장은 이미 학문이나 과학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라면 메모 한 장 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었다. 교정 곳곳에서사복형사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학생들을 감시했고, 기숙사에서 내려오는 언덕배기에는 사시사철 무장전경을 태운 닭장차가 주둔해있었다. 데모를 한다든가 이념서클에 들면 틀림없이 처벌을 당한다는 '무서운 소문'들이 신입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유신시대의 대학에는 자유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즐기고 학점을 잘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빈부격차의 원인을 연구하며, 남북통일의 방도에 대해 토론하고, 왜 술 먹고 연애 하고 학점 따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되는가를주장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단 한 뼘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새로운 형태의, 입시공부와는다른 성격의 사회적 억압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햇다. 대학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 진학은'법관'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공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유학, 대학생활이라는 신천지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법관이란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법관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타락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위해 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의 싸움 가운데몸을 던질 것인가? 나는 대학에서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선택,성인으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는 처음 직면하는 이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생활의 첫해를 다 바쳐야 했다.



절망적인 선택 : 달걀로 바위치기
 
나는 매우 냉소적인 신입생이었다.


흔히 이념서클이라 일컬어지는 학회(學會)에 가입하여 역사와 철학,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원인에 대해 눈뜨게 되고 박정희 유신정권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지만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판사가 되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결국 나는 행동할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 자체에 대한 냉소 외에는 달리 행동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유신독재는 철옹성 같아 보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할 것이고, 그가 죽으면 후계자가 또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몇백 명이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본들 신문에 한줄 보도되지도 않고 지나간다. 돌멩이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싸워도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더욱 냉소주의를 부추겼다.
 
학교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학회에서 하는 공부는 매우 흥미로왔다. 매스컴에서는 '지하대학'이라는 이상스런 명칭을 붙여주었지만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모여 일고 책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이 끝난 후 봉천동의 후미진막걸리집에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다. 매월 한 번씩은 야외로 나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했다.
 
여름과겨울의 방학에는 열흘씩 농촌 활동을 했다.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폭 넒은 이해, 논리적인 사고와발표력 등 지성인의 기본 소양을 쌓은 것은 현대식 건물과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이 있는 관악 캠퍼스가 아니라 음습한 선배의자취방과 봉천동의 쓰러져가는 막걸리집에서였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 수없었다. 여하튼 행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1학기 여름방학에 구로공단의 한 야학선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1년반의 야학활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리면 16세, 많아야 23세 사이의 여성 노동자들. 대개 전라도에서호남선·전라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공단으로 흘러 들어온 농민의 딸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에 2만 5천 원남짓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 원, 하숙비가 보통 3만 5천 원, 내가 살던 학교 기숙사의 한달 식비가 2만 1천 원, 하루 두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고등학생에게 영어·수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내가 매월 6만 원을 벌 때그들은 매주 60시간 이상 노동해서 2만 5천 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으로 먹고 입고 방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부모님의 약값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고 살았다.
 
한 달 용돈을 5백 원밖에 쓰지 않는 또순이도 있었다. 국민학교를중퇴하거나 겨우 졸업한 그들에게 국민학교 산수를 가르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밥을 굶은 적도, 내 힘으로벌어먹어야 했던 일도, 셋방살이 설움을 겪은 일도 없는 내가 스스로 가난이 싫어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다니 나는 얼마나 사치스런인간인가? 1백 원짜리 크림빵 하나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세금을 이들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국가의 녹이라는 형식으로 그세금을 얻어서 살아가는 직업을 단지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목표로 삼다니, 나는 얼마나 염치없는 자인가?


가난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이 사실은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없이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너무나 편한' 기숙사를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수없이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네번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세워졌고 단지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친대가로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교도소 담벼락 안에서 그 싱싱한 젊음을 바쳐야 했다.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감싸고 높이 좌정한판사들은 그들 순결한 젊음 위에 죄인의 너울을 뒤집어 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년 대학입시 수석합격자의 소감을 들어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어 사회정의를실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본 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억압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들을 짓밟는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이 유신체제 하에서 판사가 될 경우, 만인 후배들이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저 판사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징역 3년 4년을 선고해야 할까? 아니면무죄를 선고하고 쫓겨나야 할까? 쫓겨나려면 애초에 무엇하러 판사가 된다는 말인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고민했다.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법대에 진학하여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 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오후 2시까지 온통 고민에 휩싸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닥쳐왔을 때 나는 법대를 썼다가 지워버리고 경제학과를 써넣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몸은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경제학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취업이 순조롭기 때문에 집에다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날, 5년간이나 간직했던 법관의 꿈을 털어버리면서 나는 그만큼의 세월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했던 냉소주의와 결별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나오며 나는 가슴이 후련해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시에는 학교안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유행가를 크게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경찰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습의골방을 벗어나 행동의 광장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가슴속의 먹구름이 말짱하게 걷히지는 않았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불의와 투쟁하지 않고서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그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정치적 행동은 하나의 도덕적 결단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일 수 밖에 없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야학과 농촌활동, 학회활동과 학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행동했다. 시위대의 선봉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강의실 복도의 소화전을 열어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저 흉악한 유신체제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 해산되고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 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 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달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지역 민주노조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 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 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고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by 태방 2008. 4. 2. 09:54
http://blog.naver.com/nogari9/100048976887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게 되는 일련의 과정

그 과정을 온전히 완벽하게 지나치게 되는 사랑의 확률은

우리가 태어나서 너무나도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인생을 끝내게 되는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그만큼 각자의 개개인의 사랑의 과정과 모습들은 너무나 다양하다


온전한 과정

그 과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은 관심이 생기고 흥미가 생기고

그 흥미가 신경을 쓰이게 이끌고 그것이 설렘으로 발전하고

그 설렘이 상대의 모든점에 매력이라는 허물을 씌워

점점 설렘이 애정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을 거치고

애정이 잘해주고 싶은 마음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발산시키고

그 감정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고 그 마음이 통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교감을 주어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줄수 있는 모든것을 헌신하다

그 양의 차이에 불균등이 생기게 되고, 아님 작은 오해들이 생기게 되고

종종 한쪽이 참아가며 잘 견뎌내 가지만

그 균형이 잠깐의 실수이건, 한쪽의 거짓이건 둘 사이의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내고

그 균열이 매력이라는 허물을 걷고 불신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씌워

그 균열이 인내의 한계를 발생시키거나, 혹은 크나큰 분노를 발생시켜

둘의 처음과 같은 감정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관계의 간극을 만들어

이별이라는 슬픈 결과를 짓게 하고

그 이별이라는 결과에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대에 대한 감정

아니 그 사람이 처음에 발산했던 그 설렘과 애정이 다 씻어지지 않아

작은 오해나 잘못도 용서할 수도 있겠고, 다시 참아낼 수 있겠다 생각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크나큰 거리가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내

그렇게 힘들어 하다 시간이 기억을 잊게 해주는 그런 일련의 과정


너무나고 평범하지만

그 누구도 항상 느끼고 알아낼 수는 없는 과정


각자의 사랑에는 저 일련의 과정에서 한두군데씩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문제가 있는 위치에서는 언제나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바람둥이들은 한사람에게 애정을 쏟지 못하고 진실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며

반면 너무 외로운 사람들은 한쪽이 받기에도 과분한 사랑을 만들어 사랑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애초에 설렘을 시작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 반면

그 누구에게도 설렘을 주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닌 둘이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둘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 아닌 각자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적어도 사랑의 감정은 항상 둘이하는것이 아닐수도 있다


사랑의 과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사랑의 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수도 있으며

반면 사랑의 과정은 너무나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보일지라도

그 감정에는 불편하고 모순적이며 어리석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과정에 충실해야 하는가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가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사랑하기 위해 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과정에 집착하고 사랑의 결과에 집착하며

설렘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설렘은 사랑의 시작이지만 사랑의 정상적인 일련의 과정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행복한 사랑을 위해서는 설렘 이상의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만이 가능하다


진짜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인지, 정말 진실된 사람인지

사랑이라는 것을 나누었을때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그 본질을 명확히 알고 사랑을 했을떼 우리는 일련의 행복한 사랑의 과정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각자의 문제점에서 영원히 걸려버려

속고 속고 계속 속는 무한한 관계속에 빠져 들게 되기도 한다

바람둥이의 속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한결같은 사랑은 보이지 않을 것이며

사랑불능자에게 매력을 느껴 사랑을 나누자는 요구를 해봤자 전혀 돌아오는 답변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이 전해주는 설렘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안타깝지만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을 참고 포기하는 능력은 있겠지만

느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건 불가능 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을 느끼면서 행복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고민, 사람에 대한 고민을 늦춰서는 안된다

그냥 빠지는 대로 빠져버리는 사랑이 가져오는 슬픈 결말은

나 혼자가 아닌 남과 하는 것이기에 너무다 당연한 결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냥 좋으니까 사귀고 기분 좋으면 되는거라고 사랑을 바라보기에는

사랑의 본질은 너무나 심오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다


너무나 가벼워 지는 연애의 물결속에서

그 연애에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것이다 사랑하려고 연애하려고 하는게 사랑이 아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공유하는 가장 행복한 방법인 사랑은

연애라는 도구속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확보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상대가 사랑을 알고 있는지, 상대의 사랑이 진실된지, 그런 상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느껴보자

사랑에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행복을 풍기고 다니며

사랑에 진실된 사람은 언제나 인간미를 풍기고 다닌다

그 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갈구하고 노력하자

그것이 당신의 사랑을 행복하게 만들것이다

by 태방 2008. 3. 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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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다 싶은 때가 있어요. 그럴때는 그 일을 해야해요. 안하면 후회하게 되죠. 하지만 재미있는건 뭔지 알아요? 그일을 해도 후회할 일은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죠. 오늘 퇴근을 일찍 했는데 눈 앞에 인덕원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보였어요. 그 버스를 타면 난 동호회로 바로 갔을수도 있죠. 가면 아마 11시까지 춤을 추다 뒷풀이를 가고, 그러면 집에 두시쯤 들어와 아무것도 못하고 뻗어버리겠죠? 재미있는 네이트온도 못하고, 낼 아침에도 출근하면 골골 거릴꺼에요. 그래서 안갔어요. 사실 후회스러워요. 동호회에 가면 즐겁거든요. 하지만 안가면 즐거울지 안즐거울지 모르는 일이에요. 다행이 즐거웠어요. 근데 잠은 일찍 못자게 됬네요. 후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쩄든 뭐 그렇게 지나갔어요.

  생각을 많이하고 살아요. 후회할껀지 안할껀지 언제나 계산하죠. 그래서 후회할짓이면 안하고 안할짓이면 하고 그런답니다. 근데 또 재미있는건 뭔지 알아요? 아무리 계산을 해도 후회 할짓인데 후회 안하기도 하고, 후회 안할짓인데 후회하기도 한다는 거에요. 난 무쟈게 고민하는데 결국 아무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그냥 정신을 놓고 살기도 해요. 근데 잘 안되나봐요. 애초에 처음부터 정신을 놓고 사는 사람들이 참 부러울때가 있었어요. 마치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가 졸부들을 보는 기분? 하지만 안부러워하려고 노력중이에요. 왜냐하면 졸부들은 싸가지가 없으니까요. 난 착하기 때문에 후회를 하더라도 생각을 많이 할꺼에요.

 

  생각을 하는건 즐거워요. 무엇이 맞는지 무엇이 틀린지 판단해 볼 수 있거든요. 내 기억력은 괜찮은 편이라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을 총 동원하면 꽤나 괜찮은 생각으로 귀결이 되요.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이라고 부르곤 하죠. 하지만 대부분 짧은 시간의 경험은 인정해 주질 않아요. 그래서 난 언제나 신뢰를 받지 못하죠. 끝까지 의문을 제기하고 끝까지 믿으려 하지 않아요. 그러다 내가 옳다고 결정이 나면 그때는 원래 그런거구나 하고 넘어가 버리지요. 조금은 속상할때도 있지만, 내 업보인걸 어쩌겠어요. 난 그렇게 잘난대로 살다보면, 나도 경험의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잘 될꺼라 믿고 있어요. 솔직히 이건 걱정이 되는일은 아니에요. 후회하지도 않을꺼에요.

 

  사실 이거 말고 걱정이 되는 일이 있죠. 경험도 많고 시간도 긴데 잘 못하는 일이에요. 남들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죠. 내가 볼땐 아닌데 말이에요.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고도 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생각을 너무 안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어요. 언제나 밀어붙이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중히 고민해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죠. 난 생각을 하고 경험을 해서 판단을 하고 싶은데 전혀 할수가 없어요. 내가 결론지은 수십번의 판단 모두 후회해버렸어요.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은 순간은 없죠. 생각없이 살아도 후회했고 생각하고 살아도 후회해요. 경험이 적은 옛날에도, 경험이 많은 지금도 난 언제나 후회를 하죠. 하지만 되둘릴 순 없어요. 시간파리는 바람을 좋아하니까요.

 

  또 재미있는거 하나 알려 드릴까요? 경험도 없고 생각도 안하는 수많은 내 친구들은 언제나 후회하질 않죠. 대단해요! 친구들을 보고있자면 존경심이 들어요. 그들은 거만하죠. 후회하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당당하고 나를 깔아 뭉게곤 해요. 근데 난 할말이 없어요. 난 후회하는 위치니까요. 그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해주면 난 또 생각을 해요. 그러고 행동을 하죠. 물론 곧 후회하게 된답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다시한번 조롱해요. 처음에는 참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순리가 이렇다고 느끼는 순간 난 부끄럽지 않았어요. 아 내가 이런거구나 싶으면서 살죠. 그래도 후회는 해요. 후회할만 하죠. 왜? 또 후회해 버렸으니까.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말이래요. 난 어느새 그 말에 순응을 했죠. 근데 모르겠어요. 연습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들을 잊고 사는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후회해서 잃게 되는 것들은 정말이지 참을수가 없어요. 연습장은 찢어 버릴 수 있지만 교과서는 찢어 버릴 순 없잖아요? 난 욕심이 많은데 맨날 교과서 한권씩 버리자니 정말 참을수가 없어요. 왠지 이번에는 한번에 두권을 버린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죠. 먹물바닥에 버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또 모를 일이에요. 나는 던질때도 조심스럽게 던지지만, 어느새 내 책들은 재활용조차 못하도록 쓰레기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난 공부를 할수가 없어요!

필기도 안해놨는데. 이런, 망할. 이렇게 욕을 하고 난 또 후회를 해요. 왜 욕을 했을까. 그러고 할일이 없으니 다른 교과서를 또 사버려요. 인제 돈도 별로 없는데 큰일이에요.

 

  편하게 살고싶어요. 후회 안하고 살고 싶어요. 잘살고 싶은데 다들 욕심이래요. 부자가 되고싶은거도 아닌데 말이죠. 내가 가진거 한푼 없는 무일푼이라면 욕심을 부리는 게 맞을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나는 무일푼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아니라 그러는데 전 맞는거 같아요. 그래서 어쩔줄을 모르겠어요. 양반집안 장남인데 어께를 못피고 다녀요. 제사는 안지낼꺼지만, 그렇다고 조상님이 내 어께에 눌러 앉아계실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농담이에요) (아! 제사 안지내는건 농담이 아니에요) 아무튼, 난 빨리 시간이 지나가버렸음 좋겠어요. 시간이 약이라는데 말이죠. 내성은 안생겼으면 좋겠는데.

by 태방 2008. 3. 5. 01:49
http://blog.naver.com/nogari9/100048001717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안절부절, 정신없이 돌아가는 머릿속은 쉼없이 복작복작

  온라인은 인간을 싸늘하게 만든다. 전혀 보이지 않는 감정, 소설을 읽지 않는 요즘 세대들은 이모티콘이라는 거추장한 가면덕분에 글로써 감정표현을 하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덕분에 온라인의 대화는 무미건조하고 마음도 담겨져 있지 않으며 걸핏하면 오해를 받기 십상인 외줄타기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좋아한다. 문자는 별로 안좋아한다. 휴대폰의 음질이 좋지않아 몇번이고 계속 되물으며 전화하는 게 귀찮기도 하지만, 그래도 쉴새없이 떠들 수 있는 전화는 보내놓고 기다려야 하는 문자보다는 한결 수월하다. 대화는 지속적이여야 의미가 있으니까.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쉽게 안녕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반면, 몇번을 봐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마음도 있다. 수박 겉핥기식 관계를 말하자는게 아니다. 어색어색, 이상하리만큼 어색어색. 나는 이런 어색한 기분이 들때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 어색어색,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있는 그런 기분, 처음 보는 사람일수도 있겠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기억, 그 기억에 들어서는 터널을 지나고 나면 안절부절, 정신없이 돌아가는 머릿속은 쉼없이 복작복작. 숨이 턱 막히는 기분. 모른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런 차이도 없고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순식간에 터널을 지나는 순간 몇버을 봐도 어색하기 그지 없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어떤 대화수단도 용납되지 않는다.

 

  온라인은 사람에게 용기를 준 만큼 가벼움을 선사해 준다. Trade off. 인생의 진리. 쉽사리 던진 메신져 쪽지 한장은 아무 의미없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리지만, 다정한 전화 한통화는 잠시간의 침묵이라도 따끈한 마음을 남겨둔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한통화 걸어보면, 반가운 목소리, 반가운 대화는 이내 상투적이지만 다정한 마음은 가슴깊히 남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쉴새없이 돌아가는 내 머리는 어거지 공식을 만들어 버린다.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마법을 걸어놓은 것일까? 하루에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세요. 바람돌이에게 소원을 비는 아이들은 소원을 빌고 나면 남은 시간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감질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텐데 말이다.

 

  마음이 편치 않다. 그 편치않은 마음은 신기하게도 나 스스로가 만들어 버린다. 나 스스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최악을 생각하고 최악을 상상한다. 언제나 조심한다. 조심 또 조심. 그러고 나면 이미 저 멀리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불쾌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걸. 세상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아니 내가 이렇게 만들어 지도록 나에게 강요되어 왔다. 무미 건조한 대화 한마디에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건조한 공기에 숨막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다시 돌아오는 공포. 언제나 공포.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복권을 사지 않는다. 안될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빌어먹을 천재이기 때문에. I'm a fruitcake genius. 쓸데없는 고민이 아니다. 한가지 결론에 백번을 고민하고 백가지 근거를 만들어 백가지 단계를 거친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것 같은 나 자신의 사고는 의아해 하는 사람에게 딱 한시간만 설명하고 나면 모두가 손을 놓아 버린다. 빌어먹을. 생각이 깊은게 아니라 쓸데없이 결론을 내버리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아니면 아니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걸 못한다. 미리 좌절하라고 나는 강요받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가능성도 50%를 넘지 않으면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어짜피 안되는 일, 안되는걸 왜하나. 빌어먹을.

 

  그래. 조금 더 솔직해 져 보겠다. 조금 바보같이 살다보면 나아질것 같은 마음에(이것도 완벽히 계산적으로 내린 결론이지만) 그렇게 살려고 몇번을 마음 먹었다. 아니 난 이미 몇번이고 로또복권을 사고 사고 또 사고 있다. 물론 언제나 꽝 꽝 꽝이다. 바보가 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 또 계산을 한다. 바보가 되겠다고 해놓고 스스로 안정을 찾지 못한다. 계산을 멈추지 못한다. 그렇게, 그렇게, 결국 이렇게 해야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답도 모르는 바보 천치가 논리적으로 계산하겠다고 난리다. 이놈의 글 쓰는 도중에도 또 계산이다. 누가 와서 읽어볼까봐 문장 하나하나를 들키지 않기위에 쓸데없는 은유법만 남발하고 있다. 빌어먹을. 그냥 정신을 잠시 놓으면 안되는 거니? 왜이렇게 문제를 푸는데만 열중하는 거니? 온통 생각 생각 생각뿐 그 어떤것도 남은 것은 없다. 나를 다듬고 가다듬어 놓으면 남은것은 쓸데없이 버려진 나뿐이다. 너 왜그러니? 그냥 즐겁게 이야기 하면 그 뿐인거야. 왜 그걸 못하니. 전화 한통화에 쓸데없이 생각을 하고 쪽지 하나에 쓸데없이 생각을 하다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생각 생각 생각들로 가득차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던 시절로 되돌아가 버린다. 미쳤던 시절, 미친 시절, 아무 계산도, 아무 생각도 없이 살다가 아무런 이유없이 미쳐버렸던 시절. 생각이 깊어지면 나는 나를 놓아버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을 꾸게 한다. 다리는 떨리고 공포는 몰려온다. 멈추지 않는 불안감. 나는 진짜 바보가 된다. 그러면 또다시 하염없이 늪으로 빠져 버린다. 죽음. 영혼의 죽음. 그 순간이 올것을 알면서 나는 다시 커터칼을 꺼내 심장에 깊숙히 칼날을 박는다.

 

  바보가 되는건 습관인것 같다. 빌어먹을 천재지만 종종 바보가 되는 연습이 잘되 습관처럼 나올때도 존재한다. 그때가 몇번쯤 오게 되면 난 또 다시활짝 웃겠지. 바보같은놈. 웃는건 좋은거다. 웃으면 기쁘다. 생각은 나쁜거다. 생각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웃기지? 말도 안되는 결론. 하지만 현실이다. 난 웃을때 기뻤고 생각할때 슬펐다. 의지대로 안된다. 언제 웃을지 언제 생각할지는. 잠시 생각하는 시기에서 나는 다시한번 혼란을 겪게 되겠지. 그러다 언제 또 그랬다는 듯이 활짝 웃고 말겠지. 모르겠다. 웃기만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깊어지면 질수록 눈물만 나온다. 영원히 웃음을 안겨다 줄 수 있는 키를 가진것은 내가 아니다. 그 키가 내 마음속의 상자를 열 수 있는지에 대한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냥 복권사듯 바보같이 추첨일자를 기다리는 수 밖에.

by 태방 2008. 2. 27.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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