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nogari9/100042149458

인간은 태어나서 교육을 받는다

부모에게서, 친구에게서, 종교에게서

최종적으로는 학교에게서 교육을 받는다

교육은 당대의 시대가 쌓아놓은 지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교육 받은 사람의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는 소중한 사회화의 과정이다


성인이 되기 전의 교육의 가치는 매우 중요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 가치는 전혀 시들이 않는다

인생은 죽을때까지 배우고 사는 것이니

교육이라는건 인생 전체를 대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주로 학교 교육을 받는다

선생님으로 부터, 교과서로 부터, 학원으로 부터, 시험지로 부터

그 수많은 글자들을 우리의 글자로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나


학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학자들이 연구해놓은 그 문자들

그 문자들의 집합, 책들

그 책들의 집합, 학문

그 학문이 집대성 되어 있는 도서관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학문을 뒤집으면 공교롭게도 문학이다

요즘 문학을 읽는데 푹 빠졌다

매일 소설을 끼고 산다

읽는 속도는 그닥 빠르지는 않지만

소설을 볼때마다 빨려들어가듯이 본다


어렸을적 책읽기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하지만 문학은 전혀 보지 않았다

계몽사, 금성출판사,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학생용 도서들

다들 좋은 도서들이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한 수학, 과학과 관련된 재미있는 학습전집 60권짜리도 기억나고

마이컴과 관련된, 전자나 컴퓨터와 관련된 10권짜리 책도 기억난다

동화책, 위인전 이런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역사, 인물과 관련된 수많은 학습만화들

백과사전, 교과서, 문제집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책으로 둘러쌓여 살았었다

고등학교때까지 유일하게 읽어본 문학은 '삼국지' 단 하나뿐이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10번도 더 읽은것 같다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아오면서

난 나름 우등생이라는 칭호를 듣고 살아왔다

우등생? 무엇이 우등하다는 걸까?

분명 난 남들보다 시험을 잘보기도 하고 문제를 잘풀기도 했다

하지만 사춘기 이후 나는 내가 무엇이 잘났기에 '우등생' 칭호를 받게 되었는 지 생각해 보았다

도저히 내가 바라본 나의 모습은 맘에 안드는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사교성도 없고, 말하기도 서투르고, 책읽기도 싫어하고, 집중력도 부족하고, 의욕도 없고

고등학교 2학년 졸업할때의 나의 모습은 애송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느꼈을때는 대학교 2학년때 여자에게 처음 차여봤을때였다

여자에게 차여서 성인이 되었다는게 아니라, 그 이후부터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냥 뭐 내 느낌이니.. 아무튼 난 불완전하지만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내 교육을 생각해 보았다

성인 이전에는 환경에 의한 교육이 더 중요시 된다

성인이 되었다면 교육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를 만든 나의 환경들이 어땠냐는

지금의 나를 판단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나는 '우등생'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교육을 받아왔지만

그 모든것은 단순한 '학문'의 학습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나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는지,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나에게 어떠한 흥미가 있는지, 아니 그래 그것도 중요하지 않고

나는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그 고민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채

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수학, 과학, 그 외의 여러 과목들로부터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데에만 학창시절을 쏟아 부었다


내 인생을 만드는 교육인데

내 인생에 필요한 무엇인가보다는

유산을 받는데만 집중했던 것이다


그 허무감이 대학 들어와서 가장 컸고

서울 올라와서 극대화가 되었다

그래서 학문의 반대인 문학을 읽는데 집중적으로 신경을 쏟고 있다

이외수의 진솔함과 김영하의 강렬함 하루키의 상실감을 느끼고

지금은 파울로 코엘료가 논하는 미쳐버린 인간의 미학을 느끼고 있다


인간의 인생이 이성만으로 이루어졌다면

희노애락애오욕은 인간의 유산이 아닌 것인가

감정코드는 몇몇 깨달은 소수자들의 특권이 되야만 하는 것인가

보는대로 듣는대로 말하는대로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감정 결격자들

나 조차 그렇게 살아왔었고,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아론 나로서는

아직까지 제대로된 사랑조차 하지 못하며 세월을 하루하루 낭비하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잃어버린 20년이 아쉽기만 하지만은


결국 그 감정이란것도 스스로 교육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문학책을 읽는데 내 마음을 쏟는데 집중하고 있다면

지금의 나 역시 교육에 대한 집착의 모습을 가진 것을까?

아직도 나는 사회의 유산만을 받고싶어 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단지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서 뿐인데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면

나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


대한민국 교육이 불쌍하고

과학이 세상의 진리라 생각하는 내 친구들이 불쌍하고

지금까지 불쌍하게 살아온 나 역시도 불쌍하다


엄청나게 슬픈 현실이다

by 태방 2007. 9. 17. 22:42
http://blog.naver.com/nogari9/100042148321

가끔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

말도 잘하고 외모도 말끔하고 행동거지도 매너있고

항상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

참으로 좋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뿌리는 사람


보기 좋은 모습

맘에 드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중에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말을 해도 농담삼아 하는듯 칼이 담겨져 있고

하나도 못하는척 하면서 할꺼 다 하고 다니고

좋은 말만 하는척 들어보면 다 쓸데없는 말이고

자신의 아량이 넓은 척 남들에게 이득만 쏙 빼가고

맘에 안들면 몰아세우고 규정짓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약삭빠르게 피해가고 그 속에서 유한 이미지로 자신은 위기를 모면하고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이미지는 참 좋은데

이미지랑 다르게 참 같잖은 행동들을 한다는데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뭐 이미지 참 좋은 사람이다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조금만 알고지내면 영 속이 텅텅 빈 사람

있어보이지만 전혀 없고

잘나보이지만 너무 못난

착해보이지만 속은 너무 거짓스러운 그런 사람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행동 자체가

상대방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자기가 하는 행동이 뭐가 나쁜 행동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자기 몸에 배어있어서

또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데 있어서

그 자체를 자신의 본성으로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하기 무지하게 까다롭다

상대하려고 해도 주변사람들에게 이미지가 좋기 때문에

함부로 반하게 굴다가는 주변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하고

나 혼자 바보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부분 그 스스로도 뭐라 하는 사람을 그렇게 바보로 몰아간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실체를 들추어 내려고 해도

좀만 약삭빠른 사람이면 금새 상대를 자신의 이미지로 바보로 만들어 버리고

자연스러운 언변술로 자연스럽게 무마해버리면

그 또한 낭패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종종 만나왔다

그럴때마다 다혈질인 내가 항상 지탄받아왔지만

결국 내 진심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곤 했고

그럴때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인생 더럽게 사는구나 느끼게 되지만


여전히 짜증나면서도 상대하기가 거북한거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나중에 크게 한번 디어봐야 정신차리지 ㅉㅉ

by 태방 2007. 9. 17. 22:16
http://blog.naver.com/nogari9/100042124955

"그래, 경부운하 가서 '삽질'이나 해야겠다"
프레시안 | 기사입력 2007-09-17 09:36
대선, 삐딱하게 읽기 <1> 취업 고민 20대, '확인 사살'한 이명박

 [프레시안 박권일/전 <말> 기자,<88만원 세대> 저자]

   
2007년 대선을 맞아 <프레시안>은 기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재를 마련한다. 여론조사의 통계 수치로만 존재했던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 그간 정치 평론을 독점해 온 40대 이상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각이 오는 대선을 둘러싼 얘깃거리를 더욱더 풍성하게 해주리라 확신한다.
 
  연재의 첫 문은 최근 우석훈 박사와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라는 책을 통해 '88만 원 세대'라는 명칭을 자기 세대에게 붙인 박권일 전 <말> 기자가 연다. 겨우 서른 문턱을 넘은 박 기자는 <말>을 퇴사한 후, 현재는 '백수'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가 처음 '삐딱하게' 보기로 한 대상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이다. <편집자>

  장면 하나.
 
  2006년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취업을 못해 방황하고 있다. 이 친구는 번번이 입사시험에서 미끄러진다. 술을 잘 못 마시던 그가 부쩍 술이 늘었다. 눈가엔 '다크 서클'까지 생겼다. 보다 못한 선배가 '위로주'를 사기로 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덕담이 오고간다. "괜찮으냐?" "더 좋은 데 취직하려 그런 거다" 등. 그러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너 말이야, 눈높이를 좀 낮추는 게 어때?" 말없이 술잔만 비우던 그가, 이 말을 듣고 눈을 부릅뜬다. "차라리 눈알을 파버리고 싶다!"
 
  "지방대생, 운하에 삽질하러 가야 하나"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이런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른바 '청년실업'이라 부르는 사회현상이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다. 1997년 외환 위기(이른바 'IMF 사태) 이후, 정확히는 2000년대부터 취직을 하려는 세대에게 모순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눈높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
 
  최근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가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지난 9월 12일 충청남도 목원대 취업박람회장에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 후보는 "세계 어느 선진국도 우리와 비교해 비정규직의 수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춰 여러 경험을 살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관련 기사 : '이명박의 청년실업 대책은?' "눈높이를 낮춰라")
 
  이날 어떤 학생은 '수도권 학생에 비해 지방대 학생의 취업 길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후보는 "여러분이 지방대를 나왔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 중 상당수가 이 발언에 비판적이었다.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 지방대 학생은 분수에 안 맞는 욕심을 버리고 눈을 조금 낮춰 모두 노가다 전선에 뛰어들기로 맹세했습니다." "지방대생 전원 눈 낮춰서 삽 준비하도록. 운하 파러 가야지…"라는 이 후보의 인식에 대한 조롱과, 지방대생의 자조 섞인 댓글도 눈에 띤다.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이 후보의 발언은 마치 '요즘 20대가 철이 없어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다'는 질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박 후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해준 것이리라. 그런데 진심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다.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현실인식이 얼마나 안이하고 몰상식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생 앞에서 낯 뜨거운 거짓말
 
  이명박 후보가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88만원은, 비정규직 노동자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임금 평균 비율을 곱한 금액이다. 즉,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신조어다. 필자가 이름붙이긴 했지만, 사실 '88만원 세대'는 20대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이 탄생시킨 단어다.
 
  이 후보는 "세계 어느 선진국도 우리와 비교해 비정규직의 수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2006년 9월 22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5배"라며 "한국 경제가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 섞인 전망을 했었다.
 
  그렇다면 진위를 가려야 한다.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이 가입국 평균의 2.5배라는 IMF의 발표와 "세계 어느 선진국도 우리와 비교해 비정규직의 수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라는 이명박 후보의 발언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안타깝게도 전자다. IMF의 발표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2000년 11월 발행된 <OECD 옵저버(OECD Observer)>의 한 기사는 "한국에서 정규직 일자리 수는 OECD 국가 중 터키 다음으로 적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형편없는 사회복지 수준이 한국의 생산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설상가상 지금의 한국은 2000년에 비해 훨씬 비정규직이 증가했다.
 
  고의든 아니든 학생 앞에서 대선 후보라는 사람이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한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대통령이 되어야할 사람이 이 정도 사실도 몰랐다는 것은 더욱 낯 뜨거운 일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어른이라면, '88만원 세대'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말해주어야 한다.
 
  이명박 후보야말로 눈높이 낮춰야
 
  2007년 3월 현재 비정규직 규모를 정부는 577만 명(36.7%),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879만 명(55.8%)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결과가 좀 더 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는 정부 통계가 비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임시일용직' 등을 포함시킨 통계이기 때문이다. 임시일용직은 노동 현장에서 오랫동안 불안정 노동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고 국제적인 기준에 비춰 보더라도 정규직 노동자라 보기 어렵다.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가 특히 '악질적'인 이유는 대체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정규직으로 가는 '가교(bridge)'가 아니라 '함정(trap)'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비정규직으로 일단 경험을 쌓다가 정규직의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로 옮겨가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그런데 한국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직업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평생 비정규직만을 전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 이게 문제다. 취업 준비생이 기를 쓰고 정규직 일자리, 괜찮은 일자리만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히 지적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통계수치를 모르더라도 한국에 살고 있는 성인은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88만원 세대' 역시 미래에 대해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이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명박 후보가 대학생 수준의 실물경제 감각도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실물경제불감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 같다. 2007년 1월 3일자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다"는 질문에 이명박 후보는 이렇게 답했다.
 
  "산유국에 일거리가 너무 많다. 나는 70년대 중반부터 20년간 이와 관련된 경험을 갖고 있고 철저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이곳에 눈을 돌리면 내수와 일자리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
 
  평생 건설 현장에서 뒹굴었던 이명박 후보다운 대답이다. 하지만 1970년대와 바뀌어도 한참 바뀐 2007년 한국의 일자리 문제를,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다시 일으키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초현실주의적 해법'에 그저 망연할 뿐이다.
 
  이 후보의 발언을 보고 있노라면, 이 분과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지, 혹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정말로 눈높이를 낮추어야할 사람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바로 이명박 후보다. 한국의 경제현실에 이토록 무지한 그에게 대통령직은 너무 과분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는 현재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질주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이야말로 이명박 후보에겐 '최대의 후원 세력'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대선 관전평이나 하고 앉아 있기엔 현실이 너무 참혹하다.
 
  '88만원 세대'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규직,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는 지금 이 시각에도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은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와 달리 지금의 젊은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20대는 창조성도 진취성도 없는 획일적인 생존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승자독식의 법칙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취업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젊은이를 제외한 패자끼리 '개미지옥 게임'을 펼치고 있다. 개미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누구를 밀어 넣을 것인가, 즉 누가 개미귀신에게 가장 먼저 잡아먹히느냐를 놓고 벌이는 잔혹한 게임이다.
 
  개미지옥에 빠진 20대들은 좀 더 늦게 잡아먹히기 위해서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다. 그러니까 이건 패자부활전이 아니다. 고졸, 여성, 장애인 등 약한 사람부터 차례차례 사라지는 참혹한 '배틀로얄'이다. 협동해서 개미귀신과 싸우기보다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치다 차례차례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미 안정적 일자리에 안착한 기성세대는 20대를 내려다보며 "풍요롭게 자라서 나약하다"거나 "노력을 안 해서 취직을 못하는 것"이라 비아냥거릴 뿐이다. 그 중 진보적인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혹은 보수화된 20대'를 나무란다. 사회 전체가 미래 세대의 숨통을 죄고 있으면서도 욕하고 다그치기만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구조적 현실, 그리고 그것이 불러올 미래를 생각해보라. 이대로 간다면 지금의 20대, 즉 '88만원 세대'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다. 불안정성과 획일성이 지배하는 '88만원 세대'에서 성장 동력이 생겨날 리가 없다. 인재의 역량으로 먹고사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특정 세대가 지나치게 가난해진다는 것은 모든 세대에게 치명적이다.
 
  지금 한국은 미래를 살해하고 있다. 미래를 살해하는 사회에 파랑새는 없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에는 IMF 이후 10년간 중첩된 병폐들이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향후 20년의 미래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승자독식의 경쟁으로 힘을 소진할 때가 아니다. 세대 간 협력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를 공약으로 만들어낸 후보, '88만원 세대'의 고통에서 한국사회의 비전을 끌어내는 후보야말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 2002년 대선의 20대 투표율은 불과 56.5%였다. 지금의 20대는 최소한 2002년을 넘어서는 투표율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박권일/전 <말> 기자,<88만원 세대> 저자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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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7. 9. 17. 09:48
http://blog.naver.com/nogari9/100042080061

몸이 운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내 몸이 운다

마음이 운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그 일을 하면서 나는 하염없이 운다


사람들 앞에서 웃는다

하염없이 떠든다

내 모든걸 다 털면서 웃는다

말한다

또 말한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찾는다

나를 분출한다

터트린다

폭발한다


그러면서

혼자 있을때 나는

하염없이 운다


가끔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적이 있다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니

바닥을 멍하니 보든

천장을 멍하니 보든

가만히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가만히

정말 가만히

그 속에 몸을맞기며 잠에든다


최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이유는 없다

편하다

어떠한 자세로 조용히

나를 맞기고 그렇게 나를 흘려보낸다


우울함속에서 난 시간에 나를 맞기어 버린다

우울함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고

우울함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하염없다

우울하다기 보다는 하염없다

그리움에 욕망에 하염없다

어짜피 남은건 반복되는 일상 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시간에 몸을 맞기어봤자 오는건 내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우울하지 안다

우울해서도 안된다

그냥 그저 그렇게 하염없다


이유도 없다 목적도 없다

현실도 없다 미래도 없다

그래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물론 희망정이지도 않다

문제는 알고 답을 알 수 없다

다른 문제를 풀어도 된다

그래도 난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만나고 웃고 떠들다가

조용히 내가 남겨지면

나는 나를 버려두고 또 다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나사 하나가 풀려버린

아니 부품 하나가 동작을 안하는

무언가 정체되어 있고 없어져있는

조용히 내 인생속에서 지워져 버린 그 무언가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을 하며

온종일 한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원한다

절실히 원한다

너무나도 절실히 원한다

너무나도 절실히 간절하게 원한다


함께한다

함께하고 즐거워 한다

함께하고 즐거워 하며 행복하다

난 행복하다

난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그 행복은 행복이다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그것은 지워진 상태이다

행복하지만 혼란스럽다


갈망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것

본능은 살아있다

느낄 수 있다

느낀다

하지만 얻을 수 없다

얻을 마음도 없다

지워져 있기 때문에

얻는다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본능은 남았지만 생각은 남아있지 못하다

몸은 가지만 마음은 멈춰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아무런 일도 아닌것 처럼

그 누구도 알수 없다

그렇게 바보처럼

그냥 그렇게 인생을 지나보낸다


하염없이

by 태방 2007. 9. 16. 00:37
http://blog.naver.com/nogari9/100042003959

프로야구 설계자, 야구를 말하다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7-09-13 10:41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 이용일(사진 송기찬)

“대한야구협회 이름 바꿔라”

그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거꾸로 얘기하자고. 지금 한국야구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해야 할 거냐는 말부터 먼저 하고 싶어. 이 늙은이는 1931년생이야. 그동안 아마추어야구, 프로야구에 관여해 왔고 지금도 외국 스포츠에 관한 걸 보고 듣고 있어.

내년 대학 졸업예정자가 246명이더군. 그런데 올해 지명된 대학 졸업예정자가 24명이야. 요새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이런 거 알려달라고 하면 늙은이가 주책없다고 할까 봐 신문 보도를 보고 안 거야. 뭐? 그래도 좀 늘어난 숫자라고? 고교 졸업예정자 545명을 더하면 800명쯤 되지? 이 가운데 대학이나 프로에 가지 못한 선수가 60%가 넘어. 쉽게 말해 1년에 500명씩 사회 낙오자가 나오는 거지. 이게 오늘날 한국야구가 침체된 가장 큰 문제야.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난 예전에 군산에 초등학교 팀을 4개 창단한 사람이야. 중학교, 고등학교 팀도 만들었지. 그래서 아마추어야구 사정을 좀 알아. 선수들은 30~40년 전부터 공부를 안 하고 야구만 했어. 요사이 바람직한 기사가 나오더구먼. 연세대인가 대학 감독이 선수들 공부를 시킨다고 하더라고. 어떤 중학교에서도 그런다고 하고. 오래전부터 그랬어야 했어. 군산에서 야구하던 애들 가운데 형편없는 실업자가 많아. 이 문제가 해결돼야 기존 팀도 발전할 수 있고 팀도 늘어날 수 있는 거야.

난 대한야구협회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학생야구연맹’으로. 지금 실업팀이 없잖아. 사실상 학생야구만 하는 거 아닌가. 진정 학생들을 위한 야구를 해야 돼. 학생야구를 어떻게 건전하게 육성시킬 건가 그리고 선수들을 사회 낙오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떻게 활로를 개척해 줘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해야 해. 12월에 대만에서 야구 올림픽 예선전을 하지? 그러면 협회 회장 이하 부장들까지 다 가지.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냐. 물론 이유는 있지. 그 대회는 아시아야구연맹이 관장하니 로비라도 할라치면 안면 있는 인사들이 가긴 가야 해. 하지만 그런 데 말고 과연 학생야구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러워.

학생 선수들, 공부하면서 운동하게 해야 해. 그러면 야구부에 학생들이 찾아 와. 군산상고 얘길 해 줄까? 예전엔 야구부에 40~50명이 있었어. 지금은 스무 명이 채 안 돼. 이른바 명문교라는 군산상고가 그래. 야구는 공부 다 한 다음에 하는 거야. 그리고 쓸데없는 기교 가르치지 말고 기본기를 가르쳐야 해.

우리나라에서 메이저리그로 많이 갔잖아? 다 천재 선수들이야. 하지만 제대로 뿌리 내린 선수가 몇 있나? 난 그 이유를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으로 봐. 그런 다음에는 사회인야구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 졸업생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거지. 지금 사회인야구는 하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운영해. 협회가 방치하지 말고 관장해야 해. 신문에 기사도 내고. 그러면 회사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 아닌가. 돈을 그런 데 써야 하는 거야.

지금 KBO에서 야구부 창단하는 학교에 지원금 주고 그러잖아? 그럼 뭐 해. 지금 꼴로는 몇 년 만에 그 팀들 다 해산해. 야구하겠다는 학생이 없는데 어떡할 거야. 지금 있는 팀들부터 제대로 살려놔야지. 야구 어중간하게 해서 낙오자 되잖아. 10~20%면 말을 안 해. 60%가 넘어. 절반이 넘는단 말이야. '학생 야구'인데 '학생'은 없고 '야구'만 있어서 그런 거야.


경동중에서 육군 야구부까지

내가 어떻게 야구를 시작했냐고? 내 매부가 선린상업(현 선린인터넷고), 경성고상(뒷날의 서울대 상대)에서 야구를 한 유복룡이라는 분이야. 해방 뒤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중견수에 1, 2번 타자를 했지. 박상규(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선배보다 몇 년 위야. 어려서부터 매부에게 “용일아, 야구장가자”는 얘기 들으며 자랐어. 우리 집 바로 아래에 매부 집이 있었거든.

집에서 캐치볼도 하고 배트도 휘둘렀지. 경동중 2학년 때 해방이 됐는데 그때 매부 유복룡을 감독으로 모셔 지금의 경동고 야구부를 처음 만들었지. 1950년에 서울대 상대에 시험쳐서 합격해 상대 야구부에 들어갔어. 경남중에서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던 장태영, 경남중 유격수 박정표, 대구상업의 김홍일, 인천공업에서 온 투수 김재복 등이 내 동기야. 지금은 다들 이 세상에 없군.

1950년 6월 23일에 학도체육대회란 게 열렸어. 중학, 고교, 대학 팀이 다 참가한 대회였어. 6월 24일 성균관대랑 붙었고 다음날 연세대와 경기가 열리게 돼 있었어. 그런데 전쟁이 터져 버린 거야. 부산에 가 있었는데 서울이 수복됐어. 그때 친구들이랑 “대학생이 조국통일전선에서 구경만 할 수 있느냐”며 의기투합했어. 그래서 육군에 특과장교로 입대했지. 근무 열심히 했어.

종전 뒤 대위 계급으로 5군단 공보장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육군본부로 발령이 난 거야. 정훈감 김창정 장군이 부르더니 “우리 육군을 위해 야구 좀 하라”고 그러시더군. 사연이 있어. 육군은 순수하게 군인들로만 팀을 구성했지.

그런데 공군팀의 허곤 감독은 일반인 가운데 우수 선수들을 끌어 모은 거야. 정만오라고 좋은 투수도 그렇게 공군 팀에 들어갔지. 그러니 육군이랑 공군이랑 붙으면 사정이 어땠겠어. 수뇌부에서 “대 육군이 어떻게 일개 사단 병력도 되지 않는 공군에게 깨지냐”며 불호령이 떨어진 거야.

원래 육본은 대구에 있다 그 즈음 서울로 올라 왔어. 서울에 올라오니 졸병이 용산역에 마중을 나와 있더라고. 그 친구가 강태정(전 청보 감독)의 형이야. 그때 계급이 이등병이었나, 하사였나. 야구부랍시고 가 보니 한강 백사장에서 천막 쳐 놓고 합숙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를 찾아갔지. 돈암동에 큰 집이 있었는데 전쟁 때 인민군에게 징발돼 야전 병원이 됐지. 시체도 굴러다니고 해서 비워 둔 집이었어. 아버지께 부탁 드려 그 집을 육군 야구부 합숙소로 썼지.

김양중 스카우트 비화

이때쯤 양국진 참모차장이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 이 양반이 대단한 야구광이었거든. 무슨 수를 쓰든 육군 야구부를 강화하라는 거야. 간부 회의 끝에 “우리도 국가대표급을 스카우트하자” 그랬지. 박상규 선배에 1루수 김정환 등이 그래서 입대했어. 그걸로도 안 된다고 해서 고교 졸업 예정자던 김영복을 데려 왔지. 김영복은 나중에 농협 감독을 지냈는데 삼성에서 3루 보다 1루로 자리 옮긴 김한수의 아버지야. 송원그룹 회장 김영환도 고졸 선수로 입대했지.

그런데 스카우트 대상으로 점찍었던 한일은행 서동준이 해군에 가 버렸어. 서동준이라고 아나? 인천고 시절 명성을 날린 대단한 투수였지. 그러니 투수가 없는 거야.
1950년대 육군 야구부 더그아웃.(사진 제공=KBO)



김양중을 내가 스카우트한 얘기를 소개한 적 있다고? 원래는 육군 야구부 김일배 감독이 김양중을 데려올 뻔했어. 그때 김양중은 광주 농협에 근무하고 있었지. 그때는 금융조합(금련)이라고 했지. 김일배 감독이 김양중을 서울역까지는 데려왔는데 “농협 김영조 감독께 인사하고 오겠습니다”라는 말만 믿고 보내줬더니 소식이 없어.

난 이유를 알고 있었지. 공군 감독 허곤 과 금련 김영조 감독이 절친한 사이야. 허감독은 김감독에게 “절대 김양중을 다른 군에는 보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놓고 있었지.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 두 사람이 내 매형 유복룡과도 절친했거든. 매형 집에서 유숙한 적도 있었고. 나도 형님, 형님 불렀던 사이야.

하여튼 김일배 감독이 스카우트에 실패하자 다시 간부 회의가 열렸어. 그때 장태영이가 나서는 거야. “김감독 갖고 되겠소? 용일이를 보내야 하오.” 장태영은 나랑 두 사람 관계를 좀 알고 있었거든. 장태영은 김양중이 없으면 자기도 야구하기 힘들다고 강하게 말했지. 장태영이 경남중 졸업반 때인 1949년 청룡기 결승에서 광주서중의 김양중과 맞붙은 건 알고 있지? 그 대회에서 투수이자 4번 타자인 장태영은 김양중의 공에 꼼짝도 못 했어. 이른바 천적이었던 거지. 그 징크스는 나중에 실업야구 때도 이어지더군. 그러니 야구부장이 나더러 김양중을 스카우트해 오라더군.

난 조건을 하나 걸었지. 양국진 장군에게 광주지역 민사사령부 사령관 앞으로 ‘이 선수는 이용일 대위가 육군 야구단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각별히 협조하라’는 편지를 써 달라는 거였지. 민사사령부가 뭐 하는 데냐 하면, 병무 관계를 담당했던 곳이야. 그런데 민사사령관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출신의 나이 든 대령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 양반들 소원이 별 달고 예편하는 거였거든. 그러니 현역 참모차장의 편지 한 장이면 껌뻑 죽을 거 아냐.

광주에 내려가서 헌병대를 찾아갔지. 헌병대 중대장이 나랑 헌병학교 교관 같이 했던 사이야. 중대장이랑 함께 헌병 지프를 타고 민사사령부를 찾아 사령관에게 편지를 꺼냈지. 미리 언질을 받은 사령관은 편지를 보더니 “이대위가 김양중, 이 병역기피자를 반드시 데려가야겠구먼”하는 거야. 그래서 “기피자라고 그러지 마세요. 제 친굽니다”고 했어. 김양중은 나와 고교야구를 같이 한 사이야. 사령관은 부하 중령을 불러 “금련에 가서 김양중이 잡아 와” 하고 호령을 했어.

얼마 되지 않아 김양중이 심양섭 씨와 함께 잡혀 왔어. 심양섭 씨는 김양중이 나온 광주서중 감독으로 그땐 금련에 함께 일했지. 얼마나 놀랐겠어. 하지만 날 보더니 안심하더군. 그래서 “육군이 부르니 다른 생각 마시오”라고 주의를 준 뒤 식사를 했어. 헌병 중대장과 나 김양중이 저녁 식사를 함께 했지. 중대장은 몸집도 크고 무서운 사람이었어. 나중에 CIA에도 몸담았고. 그 양반은 “민사사령관은 나보고 미행까지 하라는데 그렇게는 안 하겠소”라고 은근히 협박도 했지. 식사 뒤에 바로 기차 편으로 서울에 올라와 야구부 숙소로 갔어. 누가 가장 설치고 좋아하는고 하니 바로 장태영이야. 이게 ‘김양중 체포 스카우트 사건’의 전말이야.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와 최관수

육군에서는 소령으로 제대했지. 학교로 돌아와 경기 때만 선수로 뛰면서 학업을 마쳤어. 1957년쯤인가 아버님 사업을 맡아야 한다고 해서 군산으로 내려갔지. 경성고무 상무, 전무, 사장을 지냈어. 그런데 1년쯤 지나니 살이 엄청나게 찌더라고.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야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았어. 몇 명은 되더라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전북 대표로 전국체육대회에도 나갔지.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겨. 이 참에 군산 야구를 키워보자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1959년인가 초등학교 팀 4개를 한꺼번에 만들었어. 그땐 국민학교라고 했지만. 그 다음엔 군산중학과 군산남중에 야구부를 세웠지.

군산중에는 그 전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선수 7~8명이 자기들끼리 훈련하는 수준이었어. 사전 작업도 좀 했지. 초등학교 야구부 졸업생들은 무조건 군산중학과 군산남중이 받아주도록 교장들과 약속한 거야. 그 졸업생들 모아서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를 만들었지. 그러니까 초등학교 팀 4개, 중학 팀 2개, 고교 팀 1개인 피라미드가 완성된 거야.

그런데 군산 출신에게 야구 감독을 맡겨보니 도저히 안 되겠는 거야. 야구를 제대로 한 사람도 없었거든. 한 1년 반 만인가 대한야구협회 김정환 심판위원장에게서 전화가 왔어. 기업은행 에이스 최관수가 은퇴를 결심했는데 마산상고에서 영입하려 한다는 거야. 자기가 군산상고를 권유하니 그리로 가고 싶다고 했다더군. 마침 기업은행 행장을 내가 잘 알았어. 서울로 찾아가 지역 야구 발전을 위해 최관수를 달라고 했지. 대신 기업은행 군산지점의 실적을 올리는 데 노력하겠다고 했어. 며칠 뒤에 발령이 났지. 최관수가 부임한 뒤 1년 만에 군산상고는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했어. 그 다음해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해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얻었지.

그때만 하더라도 고교야구대회는 결승전이나 관중들이 찼어. 하지만 군산상고 우승 뒤에는 결승전이 아니어도 동대문야구장이 미어터졌지. 왜 그런지 아나? 동대문구장 근처에 살던 호남 사람들이 야구장으로 몰려온 거야. 그러자 전남일보의 김종태(전 광주일보 사장, 2006년 작고)가 쫓아와서 “전라남도에 고교 야구부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 거야. 광주일고 야구부가 부활한 거나 진흥고, 동신고, 광주상고 야구부가 그렇게 태어났어.

좀 쑥스럽지만 호남 야구계에서는 전남의 김종태, 전북의 이용일 그랬지. 팀이 늘어나니 서울의 호남 사람들이 1회전부터 야구장을 찾았어. 그러다 보면 고향팀을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구가 좋아 야구장을 찾게 됐지. 1970년대 고교야구 인기에는 호남 야구가 부활한 덕도 있어.

최관수 얘기는 가슴이 아파. 9년 동안 감독을 맡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 9년째인가 전남북 기업은행 지점 대항 축구대회란 게 열렸어. 친선 축구인데 좀 적당히 하지. 전력질주하다 그만 철봉에 부딪혀 쓰러진 거야. 나중에 후유증이 나타나더군. 감독 10년째 되던 해 병원에 가니 파킨슨병이라는 거야. 그래서 야구 감독을 그만뒀지.

대한야구협회 시절(1978~1980)

그렇게 군산 야구와 함께해 왔는데 고무신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어. 마침 선경(현 SK)에서 인수하겠다고 해 경영권을 넘겨주고 사장 이름만 달고 있었지. 1978년 초에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과 최인철 부회장이 날 찾았어. 김종락 회장은 김종필씨 형이고 최인철씨는 프로 이후 대한야구협회를 이끈 사람이야.
1981년 12월 11일 KBO 창립 총회. 왼쪽 끝이 이용일 회장.(사진 제공=KBO)



만나보니 1978년 이탈리아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데 단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대회 앞에 네덜란드에서 한국, 일본, 쿠바를 초청해 할렘대회를 열었는데 그 대회도 참가했지. 그때 쿠바야구협회 회장인 나폴레온 씨를 만났어. 쿠바 아마추어스포츠가 왜 강한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어. 나중에 프로야구 만들 때 큰 도움이 됐지.

대회가 끝나고 돌아왔는데 가을쯤에 다시 김회장과 최부회장이 만나자는 거야.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는데 지금 조직으론 안 된다고 하더군. 그땐 실업연맹, 대학연맹, 고교연맹이 별도 기구로 따로따로 놀았어. 대회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협회 통합을 해야 하는데 내가 한가하니 일을 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각 연맹 사람들 다 만났지.

일사천리였어. 실업의 장태영, 박현식, 김영조는 나와 절친한 사이이고 대학연맹 전무이사 김진영(전 삼미 감독,김경기 SK 코치 아버지)은 내 말이라면 껌뻑 죽었으니까. 고교 쪽에선 풍규명(전 MBC 청룡 이해창의 장인)을 만났고. 언론에서 딴죽 걸면 곤란하니까 기자들도 만나 설득했어.

큰 어려움은 없었어. 사실 공갈도 좀 했어. “박정희 대통령이 체육계 부정부패를 일소하라고 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체육단체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이 모이는 야구를 ‘조질려고’ 마음먹고 있다”고 했지. 사실 아주 없는 소리는 아냐. 실제 그런 정보를 들었어. 나중에 전두환 대통령이 비슷한 일을 했으니. 연맹 사람들 만나기 시작한 게 가을이었는데 12월에 연맹 세 군데가 모두 해산 총회를 했어. 1979년 2월엔 지금의 통합 대한야구협회가 출범했지.

그 일을 끝낸 뒤 야구계에 발길을 끊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어. 나더러 전무이사를 하라는 거야. 통합은 해놓았는데 실무자가 없다는 거야. 부회장이라면 몰라도 전무이사는 곤란하다고 해서 거절했지. 그 한 달 뒤 김종락 씨가 다시 전화해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거야. 서울은행 본점 건물에 김종락 씨 회사가 있었거든. 최인철 씨도 와 있었어. 자기 체면 좀 살려달라면서 강권하더군. 그래서 “알았습니다” 했더니 바로 야구협회로 가자는 거야. 가 보니 벌써 기자회견장이 차려져 있더군.

재임 기간이 1979~1980년인데 멋지게 했지. 사실 내 멋대로 했어. 지금까지 야구 행정가 가운데 나처럼 하고 싶은 일 보람 있게 한 사람은 적을 거야. 1979년 말에 여러 구상을 했어. 큰 게 두 가지야. 하나는 고가 장비였던 알루미늄 배트를 초•중•고교에 무상 공급하는 일이었어. 그땐 아마추어야구가 인기라 협회에 돈이 있었어.

두 번째가 야구인 외국 연수야. 그때 축구팀에선 유능한 선수 출신을 유럽으로 연수를 보냈거든. 그럼 우리 야구는 협회 차원에서 야구 발상지인 미국에 연수를 보내자는 생각이었지. 워싱턴에서 협회 국제교류 문제를 맡고 있던 이덕준에게 물어보니 문제 없대. 그래서 1980년 예산에 두 건을 집어 넣었어.

하나 더 했지. 1979년 10월에 예산에도 들어 있지 없던 야구대제전을 치렀어. 협회 통합 기념으로 고교, 대학, 실업 선수들이 출신 고교 유니폼을 입고 겨루는 대회지. 김종락 회장이 “무슨 예산으로 하느냐”고 묻길래 “별도 예산 잡아 하겠다. 걱정 마시라”고 했어. 감독자 회의에서 출전교에는 모자부터 스파이크까지 야구 장비 일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언론 관계자들도 만나 협조를 부탁했지. 쉽게 말해 큼직하게 써달라고 한 거야. 첫날부터 만원이었어.

여기 편집위원인 신명철이는 그 대회에 기자로 처음 취재 나왔다고 했지. 그 대회 경험도 뒷날 프로야구 만드는 데 도움이 됐어. 대회 도중에 박대통령이 죽어 대회가 일시 중단되긴 했지만 결승전까지 모두 치렀어. 하지만 야구대제전은 1회가 마지막이었어. 이듬해 나도 협회를 떠났고.

미국 연수 얘기만 좀 더 하지. 협회 사업으로 미국 연수를 떠난 이가 지금 삼성구단 사장인 김응룡이야. 1979년 말에 김응룡이가 날 만나자는 거야. “저, 그 얘기 들었습니다. 저 좀 보내주세요” 그러더군. 김응룡은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함께 갔지. 그때 한 달 동안 같이 생활해서 인간성을 잘 알지. 그때 선수단 가운데 여럿이 선수단 비용을 어떻게든 쇼핑 등 개인 용도로 쓰려고 했지.

하지만 김응룡은 전혀 그러지 않았어. 쓰고 남은 경비는 돌려줬을 정도였어. ‘야구인 중에 응룡이밖에 없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니까. 그래서 “좋다. 1980년에는 너를 보낸다”고 승낙했어. 그런데 문제가 생긴 거야. 1980년 도쿄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게 돼 있었어. 협회에서는 감독 후보로 박영길과 한을룡을 점찍고 있었지. 김응룡은 연수 보내야 하니까 열외였고.

1979년 캐나다에서 친선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감독이 박영길이야. 김종락 회장이 미국 출장 길에 캐나다에 들러 대회를 지켜봤다고. 그런데 미국전인가 캐나다전인가에서 8-0으로 앞서던 경기를 9회말에 9점을 내줘 망쳐버린 거야. 김회장이 그 꼴을 봤으니 어쩌겠어. 박영길은 탈락이었지. 역시 김응룡이 맡아야겠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렀어. 그래서 1980년 초에 응용이를 불러다가 “1년만 연기하자, 대신 다른 사람은 그 전에 안 보내겠다”고 했지.

그래서 김응룡이 1981년에 미국 연수를 떠난 거야. 그런데 1982년 여름에 협회에서 더 이상 지원을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더군. 그때면 내가 프로야구 사무총장하던 때야. 마침 그때 해태 감독이 공석이었어. 김동엽 감독이 여러 문제를 일으켜 물러나고 조창수가 감독 대행을 맡고 있었지. 박건배 구단주에게 “김응룡이면 몇 년 안에 우승할 수 있다”고 추천했지. 김응룡이 귀국하고 며칠 뒤 박구단주와 만났는데 응룡이 이 친구가 그 자리에서 감독 제의를 오케이해 버렸지. 난 내심 좀 ‘튕겼으면’ 했지. 김응룡이 해태 감독이 된 사연은 그래.

프로야구 창설

이제 프로야구 이야기를 해야겠군. 전두환이 집권한 다음에 숙정 바람이 불었어. 그래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서울상대 동기인 이호헌(전 KBO 사무차장)에게서 연락이 왔어. 김동엽이 “문화방송(MBC)에서 프로야구단을 만들 생각이니 도와달라”고 했다더군. MBC 이진희 사장이 창사 20주년 기념 사업으로 독립기념관건립과 프로야구단 창단을 계획하고 있었거든. 김동엽은 MBC 기획실에 있는 후배에게 부탁 받은 거였고. 하지만 리그는 아니고 축구의 할렐루야처럼 한 팀만 만들겠다는 거였지.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두 달 뒤 이호헌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어. 이호헌의 마산상고 동기동창에 우병규라는 이가 있어. 우병규는 전두환과 국방대학원 동기였는데 그때부터 친했다고 하더군. 전두환 정권이 열리니 정무수석이 됐어. 우병규가 이호헌에게 연락해 “이상주 교육문화 수석 좀 도와 달라”고 했대. 대통령이 프로스포츠를 만들라는데 그 계획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거야.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개막전.(사진 제공=KBO)



이상주 수석이 축구협회, 야구협회에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했어. 그런데 야구에선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끝낸 뒤 추진해 달라고 했고 축구에선 450억 원을 들여 축구장을 지어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때 450억 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어. 보고를 받은 전두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역정을 내 비서관들이 기합을 받을 꼴이었어. 그런데 프로야구를 1982년에 당장 시작하려는 게 당시 청와대의 생각이었어.

그래서 ‘한국프로야구 창설계획서’라는 18페이지짜리 문건을 내가 만들었지. 작성에 20일 걸렸어. 9개년 계획이었는데 각 3년씩을 성장기, 발전기, 안정기로 나눴지. 문건을 만들어 신라호텔에서 이상주를 만나 계획서를 줬어. 이 보고서를 갖고 당시 실세라던 비서관 네 명이 회의를 했어. ‘3허’라던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과 이학봉이었지. 결론은 이 계획서로는 안 된다는 거였어. 가뜩이나 지역 감정이 심한데 프로야구가 지역 감정을 더 나쁘게 할 수 있다는 말이었지. 내 계획서에는 프로야구는 철저한 지역 연고를 바탕으로 하게 돼 있었거든.

이상주가 회의 결과를 들려주면서 난색을 나타냈지. 그래서 설득했어. 1978년 네덜란드에서 만난 쿠바야구협회 나폴레온 회장 얘기를 했지. 나폴레온 회장은 쿠바야구가 발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어. 쿠바에선 초등학교부터 국가대표가 될 때까지 출신 지역에서만 야구를 하게 돼 있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사라도 가면 국가대표로 발탁이 안 돼. 자기가 야구를 배운 곳에서 계속 야구를 하니까 선수는 자기 고향에서 영웅이 되는 거야. 영웅을 보기 위해 야구장은 꽉꽉 차고. 나도 원래는 선수를 출신지로 분류해 연고 구단에 배정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답이 안 나오는 거야. 그 많은 선수들 출신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출신 고교를 기준으로 한 거야.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했어. 세계에서 남미 사람들이 가장 다혈질이다. 축구장에서 총기 사건도 일어나고 난동도 벌어진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축구 관중들이 축구장 밖에서 소요를 일으킨 적은 없다. 그러니까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난동을 일으키더라도 그 사람들이 야구장 밖에서 데모를 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애향심이 강해지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과 이어지지 않느냐고 설득했지. 다음에 이상주를 만났더니 “계획서대로 추진하라. (창설 과정에서 필요하다면)청와대를 마음대로 팔아도 좋다”고 오케이 사인을 주더군. 뭐, 난 많이 팔진 않았어.

계획서 얘기를 좀 더 할게. 전국을 6개 지역으로 나눠 연고 기업에 맡긴 다음 연고지 고교 출신 선수들을 뽑는다는 구상이었지. KBO와 대한야구협회에서 펴낸 <한국야구사 >에는 부산이 롯데, 서울이 MBC로 돼 있어.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런데 2003년인가 <중앙일보> 이태일 기자 부탁으로 예전 일을 회고담 형식으로 연재한 적 있어. 그때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보고서를 찾았는데 서울이 롯데, 부산이 럭키로 돼 있더군. 그러니까 지금 롯데와 LG의 연고지가 거꾸로였던 셈이지. 호남 지역 원래 후보가 삼양사였다는 건 좀 알려져 있지.

여기에는 다른 비화가 있어. 삼양사가 어렵다며 사주들이 친척지간인 <동아일보>에 호남을 맡길 생각이었지. 일본도 요미우리신문은 물론이고 예전 일이긴 하지만 <아사히신문>도 프로야구를 운영한 적이 있어. 내 계획서에는 <중앙일보>도 창단 후보 회사였어. 삼양사 김상홍 사장은 동생들이랑 논의하다 “아무리 전두환이가 시키는 거라지만 우리가 무슨 스포츠를 아냐”며 포기했지. 그래서 <동아일보>에 계획서를 줬는데 거기에서도 거절이야. 그런데 계획서가 신문사 편집국에 도는 바람에 <동아일보>에서 프로야구 출범 특종 기사를 쓴 거야.


KBO에 대한 고언

옛날 얘기가 길었군. 아마추어야구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프로야구 이야기로 끝을 맺지. 난 우리 프로야구가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할 사람이 둘 있다고 봐. 한 명은 프로미식축구 NFL의 피트 로젤 전 커미셔너야. 이 양반의 철학은 이거야. 모기업이 돈이 많든 적든 리그에 소속된 모든 구단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구단의 재원은 균등해야 한다는 거지.

그 양반은 1961년에 취임해 28년 동안 이 체제를 만들었어. 그 결과 NFL에는 적자나는 구단이 없어. 수퍼볼 중계권료가 1961년에 얼마였는지 아나? 61만 달러인가 그랬어. 지금은 수백 배 넘게 뛰어 올랐지. 그 돈을 다 균등 분배해. 지금도 NFL에선 우승팀 예상이 안 돼. 스카우트와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느 팀이든 우승할 수 있어.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려면 다 망하는 거야.

두 번째 사람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구단의 피터 캐년 사장이야. 스포츠용품업체 업브로 사장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단장을 거쳐 2004년에 첼시 사장으로 부임했지. 유럽 스포츠는 미국과 달리 스폰서 수입이 막대해. 그런데 2004년에 첼시 스폰서료가 300만 파운드(약 57억원)인가 그랬어. 그걸 2005년에 5천만 파운드로 만든 거야. 이 양반이 뭘 한 줄 알아? 첼시 감독으로 최고의 인재를 데려온 거야. 그리고 감독에게 “내년 선수 예산이 얼마다”고 알려줘. 그럼 감독은 예산 범위에서 선수 영입 계획을 세워. 사장은 그 내용대로 유럽 전역을 돌려 스카우트를 해 오는 거야.

이런 건 미국 메이저리그도 못 따라 가. 그렇게 하니 두 시즌 연속 우승을 했어.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고 스폰서료도 덩달아 올라갔지. 그래서 삼성전자가 첼시에 1년에 190억 원씩 내는 거 아냐. 그 돈 내는 쪽도 만족이야. 효과가 크거든.

지금 KBO 총재나 총장이 이런 데 관심이나 있을까. 무슨 위원회니 자리만 잔뜩 만들어 놨어. 나도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할 때 “전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총재가 되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냐.

정치인 총재? 구단주 총재?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한국프로야구 발전해야 해. 나이, 젊어도 좋아. 40대, 50대라도 프로야구에 애정과 열정이 있고 매니지먼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해. 그래서 한국적인 프로야구 발전 계획을 만들어야 돼. 열심히 연구하면 나오게 돼 있어. 내가 젊으면 하겠는데 늙어서 안 되겠어. 지금도 한참 떠드니까 멍해.

KBO는 기구를 대폭 축소해야 해. 조직이 너무 커. KBO에 왜 홍보팀이 필요하지? 프로야구 홍보는 구단에서 하는 거야. KBO는 조직만 축소하면 예산 3분의 2가 줄어. 그 돈을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써야지. 초창기 KBO 예산이 4억~5억 원이었어. 그런 시절에도 6천만 원짜리 컴퓨터를 들여 놓고 기록 관리를 했어.
1990년 11월 30일 한일 슈퍼게임 조인식. 오른쪽 끝이 이용일 전 총장.(사진 제공=KBO)



지금 예산이 100억 원이 넘어. 프로야구가 살 방법은 지금도 많아.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쓸데없는 데 들어가는 돈이 많더군. 그 돈이 어떤 돈이야. 삼복더위에 선수들이 땀에 절어가며 번 돈 아닌가. 다 선수들이 번 돈이지. 중계권료니 스폰서료니.

사실 프로야구가 사는 길은 간단해. 잉글랜드 프로축구가 어떻게 발전했나? 1980년대에 축구장에서 사고가 일어나 몇십 명이 죽었어. 이래서 안 되겠다 싶어 축구장을 좌석제로 바꾸고 환경을 개선했어. 새 구장도 만들고. 이러니 새로운 팬층이 나타났어. 어린이들과 가족 단위 관객이 확 늘었어. 환경이 좋아졌으니까. 이게 기본이야. 구단의 수입이 느니까 비싼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고 경기 수준이 높아져. 그러면 브랜드 가치가 높아져서 중계권료와 스폰서료가 올라가지.

기본적으로 환경이야. 프로야구 출범할 때 서종철 총재와 내가 시장들 찾아다니면서 구장에 대해 논의를 했어. 그땐 조명시설이 없는 구장도 많았거든. 그런데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뭐야. 지금 구장은 우리 국민들이 판잣집 살 때 구장이야. 이제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매일 목욕하고 있단 말이야. 이 사람들이 판잣집 살 때 야구장에 가족을 데려가려 하겠어?

잠실야구장을 어떻게 만든 줄 아나? 1978년에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는데 3만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야구장이 필요했어. 서울시장 만나서 구장 지어달라고 하니 그저 듣기만 해. 그래서 김종락 회장이 다시 시장을 찾아가서 1억 원을 내놨어. “야구인들이 야구장 건립을 위해 모금한 돈이니 구장 건설에 보태주십시오”라고 했지. 사실은 협회 예산이었지만.

그래서 잠실구장이 생겨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도 열고 프로야구에서도 쓰고 있는 거야. 김종락 씨 얼굴도 얼굴이었지만 그때 1억 원 안 내놨으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나 돼서야 잠실구장이 생겼을 거야. 지금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구장이 대구, 광주, 대전 구장 아닌가. 이 세 구장에서 해마다 10억 원씩만 내놔 봐. 그게 언론에 크게 보도될 거 아냐. 그럼 시에서 새 구장을 안 만들 수 없어. 여론 때문에. 지금 KBO가 쌓아두고 있는 돈이 백몇십억 원이야. 그거 놔 두고 뭐해. 쓸데없는 데나 쓰고 있고.

“돔구장은 감당도 안 돼”

돔구장? 일본프로야구 얘기를 좀 해 줄게. 긴데쓰 버팔로스는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가 출범한 1950년 창단했어. 이 팀이 2004년 시즌을 마치고 없어졌어. 명목은 오릭스와 합병이었지만 실은 돈 한 푼 안 받고 선수들 죄다 넘겨준 거야. 그때 사장이 야마다라는 사람이었는데 주주총회를 하려니 걱정되는 거야. 50년 넘게 버팔로스 팬이었던 주주들이 가만 있겠냐는 거지. 웬걸. 총회에서 주주들이 기립 박수로 용단을 내린 사장을 환영했어. 반대 의견은 하나도 없었고. 1년 적자가 30억 엔이 넘는 야구단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긴데쓰는 일본 사철 가운데 철도 연장이 가장 긴 큰 회사야. 그런 회사도 그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안 그런가. 도쿄돔 3층 관중석이 비고 니혼 TV 시청률이 떨어지니 와타나베 쓰네오 오너가 비싼 선수들 다 내보내라고 한 거야. 사실 이승엽이한테 4년 30억 엔 준 건 특별한 거야. 근데 승엽이가 보답을 못해. 일본프로야구도 위기야.

그런데 긴데쓰의 적자가 어디에서 나온 줄 알아? 3분의 1 가량인 10억 엔이 오사카돔 사용료야. 손정의가 인수한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미국 투자회사에 연간 40억 엔 내고 후쿠오카 야후돔을 빌려 쓰고 있어. 이것저것 수입 따져보면 실제 사용료는 10억 엔 정도라더군. 예전에 요미우리가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계약할 때 ‘언더 테이블 머니’로 20억 엔을 냈다는 게 정설이야. 세이부 라이온스는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30억 엔 줬다더군.

그런 일본 구단들이 지금 10억 엔을 아까워하고 있어. 지금 오사카돔에선 일년에 몇 번만 프로야구 경기가 열려. 긴데쓰와 합병한 오릭스나 인기 구단이라는 한신 타이거스가 10억 엔 때문에 오사카돔을 못 쓰는 거야.

그런데 한국에 돔구장이 생긴다면 어떨까. 돔구장 건설에 4천 억~5천 억 원이 들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감당할 수 없어. 그러니 민간 자본 유치하겠지. 민간 회사에서 50년을 갖고 있더라도 투자금 회수하려면 연간 100억 원씩 사용료를 받아야 돼. 두 구단이 돔구장을 쓰더라도 50억 원인데 그 돈 감당할 프로야구 구단이 있어? 난 돔구장을 추진한다는 얘기 듣고 속으로 ‘웃기지 마라’ 그랬어. 구단들이 여론에 밀려 돔구장 들어가더라도 1년도 못 돼 예전 구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거야.

왜 돔구장을 만들어. 훨씬 적은 돈으로 3만 명 정도 규모 구장을 만들거나 구장 환경을 개선할 수 있어. 그러면 관중이 오게 돼 있어. 그럼 중계권료와 스폰서료가 올라가 구단이 빨리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돼.

이 용 일


1931년 4월 17일 서울 출생

경동중-서울대학교 상대

1945년 경동중 야구부 창설

1950년대 군산지역 초등학교, 중학교, 고교에 야구부 창설

1979~1980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

1981년 프로야구 창설 작업

1981~1991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1992~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




SPORTS2.0 제 67호(발행일 09월 03일) 기사



신명철 편집위원,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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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7. 9. 1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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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격정 토로 “제주부터 충북까지 해봐야 우리 꿈이…”

[한겨레] [인터뷰 후기] ‘청남대서 낚시꿈’ 빈말였나
“맡겨달라…내 분수 잘 안다”


“모든 인터뷰서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11일 밤늦게 이뤄진 인터뷰가 끝날 무렵 4년도 더 된 옛날 얘기를 꺼내봤다. 그때 유시민 후보는 기자와 따로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바라는 게 있다면 청남대에서 낚시 한번 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욕심이 없음을 내보이고 싶었을 게다. 믿었다. 그런데 ‘출마’와 ‘낚시’는 번지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얘기가 아팠을까. 유 후보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긴 토로가 끝난 뒤 “사실은 모든 인터뷰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처음으로 했다”고 후련해했다.

유 후보의 말을 줄여서 옮겨 본다.

“저에 대해 정치적 소유권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자원봉사 해주고, 표 찍어주고 …. 이분들로부터 ‘우리가 가진 꿈을 얘기해 보자, 왜 안 하느냐’는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저는 ‘그거 안 된다. 우리들 소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현실과는 간극이 너무 크다. 당선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선거전도 어렵고 표도 별로 못 모을 거다. 우리 목소리는 아마 시끄러운 대선 격랑 속에서 묻혀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분들이 ‘안 되는 거 알면 받아들일 텐데 왜 미리 안 된다고 그러냐’고 한다. 저로서는 정치의 책임성 때문에 ‘안 되는 거 확인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이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해 보자는 간절한 소망이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제주·울산·강원·충북까지 해 봐야 비로소 우리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뛰다가 빠져 죽을지, 그래서 돌아와야 하는지,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고비마다 한발 삐끗하면 그냥 죽는 경기다. 우리로서는,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소망이 국민의 소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온몸으로 밀고 가는 거다. 미숙하고 공약도 준비 덜 됐고, 치밀하지도 않지만 2002년부터 5~6년 켜켜이 쌓인 한이라면 한, 소망이라면 소망, 이루지 못한 분노가 있다. 좋은 정당, 정책 정당,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정당, 당원이 주권자인 정당을 만들어서 진보적인 목소리 내고 대한민국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보자는 소망이다. 우리는 그것을 세상을 향해서 화악 터뜨리고 싶은 거다. 단일화 요구에 논리적으로 응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제 20일 왔고, 앞으로 닷새 뒤면 또 우리가 소리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친노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왔다. “그럼 어떻게”가 기자로서 가장 궁금한 대목이다.

유 후보는 “그냥 정치하는 사람에게 맡겨 달라. 우리가 정치적으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국민 뜻 살펴서 한다. 또 자기의 주체 역량과 분수를 잘 안다. 무슨 (대통령) 병 걸려서 출마한 것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뭔가 단단히 준비해 놓은 게 있는 듯한 말투였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영상/ 은지희 피디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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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방 2007. 9. 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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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분명 존재한다

현실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고 바라고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듣고 느끼고

그 모든것들


분명 모든것은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들이 있다

확인이 불가능한 현실들이 있다

우리는 그 현실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은 존재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속에서 자꾸만 갈등을 한다

그래 그 말이 맞는데

그래 이것이 옳은 건데

왜 이렇지 않을까 왜 아닐까

자꾸만 난 거부하고 싶어만 할까


정답은 없어도 언제나 선택은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생각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결론은 인간을 행동하게 하고

그 행동은 언제나 옳은것을 향해 움직인다

그것이 현실이든 진실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우리는 결국 맞는 선택만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도 계속 우리는 현실이 없다고 느끼고

진실은 사라졌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자꾸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며 실망하기도 한다


뭘까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부자가 되는것은 아니듯

올바른 길을 가도 자꾸 벽에 부딫치곤 한다

옳은게 보이고 현실이 보여도

자꾸 벽에 부딫칠때마다 흘리는 피는

내가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자신감에 넘치고 낙관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던 내가

전보다 더 웃고 더 즐겁게 살고 있음에도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다시는 현실이 돌아오지 않을까

다시는 진실이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눈물

무서움의 눈물


무서움을 모르고 살아왔던 내가

자신감은 얻었지만 두려움을 얻었다

미래를 얻었지만 과거를 잃었다

현실을 살지만 지금을 버렸다


불과 몇년전에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하고 또 하고

내가 옳고 내가 맞다는 생각으로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곤 했었는데


뻔한 사실이 눈앞에 있음에도

그 사실을 돌아서 시궁창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

아니 궂이 그 사실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면 그만인것을

왜 자꾸 아닌 길로만 골라서 가려고 하는지

애써 지우려 하고 있는지


사춘기 이후 언제나 고민에 싸여 살아왔던 나이지만

답을 낼 수 조차 없는 고민 앞에 있게되니

쓸데없는 삶의 무게로 자꾸만 나를 짓누르게 된다

좋은일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나쁜 일들을 캐내게 된다


기대된다

기대한다

꿈이 이루어진다

그 상상의 블랙박스를 뜯지못하고

일상의 반복 루틴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몇번이고 바닥에 던져가며

부셔서라도 열어보고 싶던 그 블랙박스는

타임캡슐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지 않을까


블랙박스의 열쇠를 찾게되는 그 날

나는 나의 해방을 외치고 싶다

by 태방 2007. 9. 11. 23:01
http://blog.naver.com/nogari9/100041812366

과거의 아름다운 일들은 추억이 되고

과거의 가슴아픈 일들은 상처가 되고


그 과거 속에서 허우적 되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이 되지만

결국 인간은 죽지 않으면 살아가기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본다


그 미래속에서 나는 어떠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 방향을 만드는것은 다름아닌 과거이다

지금 이 순간은 결국 과거의 끝자락일뿐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모든것이 과거와 연관이 될 수 밖에 없는 일들


과거의 가슴아픈 일들은 상처가 된다


그 상처는 사람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강하게 하기도 한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어떻게든 상처를 안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살아왔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내 받은 상처들 작은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것들도 아니다

그 상처들을 안으며 나는 조금씩 미래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그러면서 20대의 3부능선을 넘는 아슬아슬한 언덕위에 서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실수는 한번쯤 하는 인간이지 않는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살만한 가치가 있는거 아니겠는가


불완전함은 인간을 좀 더 노력하게 만들고

불완전함은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들고

나아가 인간이 성숙하고 발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인간의 불완전 함이라


불완전함으로 인간은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이 만드는 결과에 우리는 상처를 받곤 한다

그 상처속에서 미래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상처는 곪으면 고름이 나오고

사람도 곪으면 우울해 진다

우울은 상처의 고름일뿐 병의 본질은 아니다

고름은 짜 내고 약을 바르면 낫게 되듯

우울도 이겨내고 사람을 바르면 낫게된다


상처도 우울도 모두 겪어본 인생을

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쓴만큼 열매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아니 기회를 주곤 한다

모두에게 주지 않는다


무언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건 아니겠지만

인간이라면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이 곧 행복해지는 것이기에

그렇게 인간은 인생을 살아간다


그 욕구를 얻기 위해 사건을 만들고 상처를 받는다

불완전 한 동물이기에

실수도 하고 상처도 받으면 결국 열매를 얻게 되는게 당연하다


짖은 상처가 있다

누구에게나 있다

가슴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그런 상처를

상처는 사람을 강하게 하기도 하지만

상처는 사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때린 자리를 또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면

처음에는 아파하다가 나중에는 그 근처에 손만 가도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된다

그 이유는 없다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

인생도 그렇게 반응을 한다


절대 깊은 상처가 아니다

절대 고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인생에 무언가 조용하게 나를 짓누르고 있다

해답도 없고 정답도 없다

아니 답안 근처라도 가 본적도 없고

남의 답안을 훔쳐서 배껴 적어본 적도 없다

그냥 답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물음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받으면


상처받은 곳에 상처를 받으면 흉이 지고

흉이 진곳에 상처를 받으면 다시 흉이 지고

그러면서 그 흉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다른곳과는 다른 색을 띄게 된다


그 색은 더이상 나의 색이 아니다

내 인생을 짓누르는 흠집에 불과하다

그 흠집을 평생 안고 살며

과거의 상처를 가슴에 안지도,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나의 색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이다

그 인간의 힘을 믿기에 나는 그 상처를 안고도 한걸음 미래로 더 나아간다

하지만 그 흉은 분명히 나의 색이다

내 원래 피부색과 다르더라도 그 상처는 분명 나의 것이다


성형은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다

성형은 과학의 힘을 빌린 인간 순리의 거부활동이다

결국 나의 다른 피부의 색깔은 내 인생을 거부함으로서 바뀔 수 있지만

그런 거부를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신이라면 해줄 수 있는 그런일 아닐까


그 흉속에서 나를 짓누르는 그 바이러스들은

언제쯤 내 몸밖을 탈출할 수 있을까


그런 흉들이 몸에 조금씩 커져 나가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는 않을까


이런 말도안되는 고민들을 안고서도

결국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내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흐르는 시간에 등떠밀려 지는것 뿐일까





역시 되도않는 고민이다

by 태방 2007. 9. 8. 02:48
http://blog.naver.com/nogari9/100041741275

회사에서 일하게 된지 딱 한달째가 되었다

앞으로 남은 수습기간은 2개월

앞으로 일하게 될 기간은 최소 36개월

나에게 정확히 3년이란 시간동안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하루의 절반남짓을 보내야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대학생활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사회인의 자유와 경험을 모두 누림과 동시에

그에대한 책임은 아주 극히 일부만 지면 되게 된다

그러한 대학생활을 탄탄히 보내는것이야 말로 정말 행복한 일이다


내 대학생활이 탄탄했나에 대한 판단은 좀처럼 하기가 힘들다

아니 그 누구의 대학생활도 언제나 득이 있으면 실이 있고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모자란 부분이나 아쉬운 부분들이 있는거고

그런의미에서 내 대학생활을 판단하는건 조금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만


어쨌든

대학생활의 자유가 뺏겨진것은 사실이다

법정 근로시간 8시간 + 보통 잔업하면 3~4시간 정도

그 시간동안에는 회사 안에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갖혀서 지내게 된다

그런 자유속에서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을 할 수 있기 보다는

주어진 일을 계획적으로 진행하는 것만 가능하게 된다

그 주어진일을 자신에게 맞게 계획한다면 그 일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만

항상 그런 일만 주어진것은 아니라는것을 회사 생활해보면 누구나 안다


아무리 의욕적으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조직 상사로 부터 내려진 명령을 하는것 이상을 계획한다는건

정말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거라는 말이다


대학생활 4년의 소중함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계획하며 나의 인생을 사는것이 어려워 지기전에

4년동안 나 자신을 확고히 세우고 내 인생의 방향을 종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생때 인생을 결정지으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말이다)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현실적인 목표 속에서 내 인생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대학생 시절이라는 말이다


나는 회사생활하면서도

조금 무리해서라도 내가 계획한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 마음 먹은대로 되는것들이 많지가 않다

주로 차선책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학생활이 그리운건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이미 주어진 4년은 끝났고 3년간 인생 대기상태에 놓여져 있다고나 할까

(물론 내가 전공으로 직업을 별로 갖고싶지 않아서 일뿐이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 계속 하게 된다면 지금의 시기또한 나에게는 중요할 것이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일단 하고 나면 경험으로 남게 되는것은 당연지사이므로

일단 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만 마음먹은 일이 아니라는 것 자체에 나의 근본적인 스트레스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며

내가 아직 대학생의 끈을 놓고있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매일매일 조금씩 우울함과 함께 생활 하고 있다

by 태방 2007. 9. 5. 22:27
http://blog.naver.com/nogari9/100041471813

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무언가 슬프면서도 행복한 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다는거 만큼 만족스러운 것도 없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움직일때 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지문 인식기에 찍히는 퇴근도장의 미묘한 기분은 직장인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9시 이후에 퇴근할때마다 야근 수당이 얼마일까만 고민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이제 나도 직장인 다 되었다 싶지만 그래도 회사에서는 아직도 마땅히 하는 일은 없다. 천천히 지나다보면 일이 주어지겠지. 뭐 그건 중요한 일도 아니다 난 일단 퇴근했다. 당당히 퇴근하는 길이기 때문에 오늘은 계단으로 몰래 내려가지 않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군포역까지 걸어서 15분, 꽤나 먼거리지만 난 언제나 걸어간다. 군포역까지 퇴근 버슥 운행되지만 왠지 타고 싶지는 않다. 한번도 타본적이 없어서 두려워서이기도 하고, 아직은 그정도쯤은 걸어 다닐 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냥 귀찮아서라 해두자 언제 올지도 모르는 차 기다리느니 그냥 걷고 만다. 군포역 가는 길은 공단이 많다. 나보다 훨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하는 일은 일도 아니겠지? 너무 편한 인생만 살아왔으니 지금의 내 불평불만은 최대한 가슴에 담아두고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힘든건 힘든거, 정말로 누구나 가슴에 상처하나쯤은 있는거니까. 그렇다고 그 상처를 버리고 살 수는 없다. 누구나 상처 하나쯤 있는 만큼 누구나 그 가슴의 꽃한송이는 고귀하고 소중하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그냥 군포역 가는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저녁을 못먹을거 같아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김밥 두개와 보너스로 주는 바나나 우유를 하나 산다. 삼각김밥이고, 라면이고, 피자고 하는 음식들은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전적으로 과거의 먹던 추억이 몸에 배여 먹는 음식들이다. 어렸을때는 그리도 맛있는 음식들이었는데. 라면은 지금먹으면 맛이 정말 별로 일때가 있다. 요즘은 국밥이 맛있다. 나도 늙었나보다 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입맛이 바뀐건 분명 맞을 것이다. 삼각김밥 역시 기분 좋게 샀지만 맛은 별로 였다. 고등학교때 몰래 학교에 나와서 컵라면과 사먹을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그래도 싸니까 먹는다.

  군포역에 도착한 시간은 6시 28분. 걸어오는데 20분 가량이나 걸렸다. 7시에 가는 모임인데 왠지 느긋하다 군포역은 아무리 바빠도 나에게 여유를 주는 광경이 있다. 개찰구를 나가 왼쪽으로 두번 돌아 내려가면 내가 자주 가는 탑승구가 있다. 그 자리에서 항상 바라보는 나무와 풀들, 건너편 출구, 백원짜리 소주를 파는 술집, 고시원, 시장, 그리고 기찻길. 항상 같은곳에서 기다리면 항상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이어폰을 잃어버려 MP3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음악을 고르곤 했었는데. Muse, Clazziquai, Steve Barakkat. 그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 음악들 만을 골랐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별 쓸데없는 생각들에 잠기다 보면 시간은 빨리가고 기차는 금방 온다. 시간을 계산하며 '또 늦었군'을 혼자 외치고 기차에 올라타 앉을 자리를 둘러본다.

  자리가 없다. 그래도 이시간때 치고는 사람이 없어서 곧 자리가 생길것 같다. 오늘은 충무로까지 가야해서 앉아 가고 싶다. 책을 핀다. 상실의 시대. 번역체는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일본 문학을 이렇게 빨려들어가며 읽게 된다니 신기하다. 재미있다. 재미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염없이 책을 읽어간다. 피로때문에 뒷목이 땡기지만 그래도 멈추지를 못한다. 앞에 자리가 났다. 바깥 광경을 못봤지만 그래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음악을 듣던 즐거움이 책으로 옮겨 간듯한 기분. 회사에서 하루종일 숫자와 회로만 보던 나에게 책은 조용한 해방을 준다. 서울역이 다 와갈때까지도 책이 두꺼워 반도 못읽었지만, 마치 더 자야할 잠을 자다 만 기분으로 책을 덮고 4호선으로 갈아타 충무로로 향한다.

  누구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날. 강연따위는 관심없다. 오로지 사람, 사람을 원한다. 나와 몇달 몇년간 함께했던 사람들, 그들이 없으면 미쳐버리기에 미치지 않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간다. 힘들고 지치지만, 왠일로 저 안쪽 구석에 있는 건물이지만 힘들지가 않다. 지하철 타고 한시간, 걸어서 20분을 더 들어가는 동안 땀은 한바가지를 흘렸지만, 문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금새 웃음이 난다. 대화 하는것 만으로 날아갈 듯이 기쁜 시간들, 취직하기 전 하루 종일 그 시간들과 함께 했었다는것 자체가 이제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배불렀던 시간들, 내 인생의 무한한 해방감을 주었던 시간들, 이제 그 시간들을 뒤로하고 회사일에 전념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회사일이 싫은건 아니다. 하지만 하루종이 이눈치 저눈치 보고만 있노라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느껴진다. 조직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져야 하는건가? 조직은 누구를 위한 조직인가? 나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인가? 먼저 들어온자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건가? 쓸데없는 고민들속에서 살아가지만 난 그래봤자 신입사원일 뿐이다. 그곳을 탈출하여 나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화 하고 있자니 이건 사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강연은 한자도 안듣고 밖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과 농담따먹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뒷다마도 까고 하면서 보내는 시간들, 예전에는 쓸데없다고 느꼈던 시간들이 지금은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시간들도 그들에게는 평범한 시간들일 뿐이다. 나의 감격이 그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고, 술한잔이라도 하고 싶은데, 나의 감격은 도통 전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화가 많이 났다. 나는 눈치 봐가면서 어떻게든 일찍 퇴근해 한시간 넘게 차를 타고 도착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사용하고 싶은데, 나를 반겨 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들 일이 있어 집에 일찍 간다. 그뿐이다. 그들의 삶속에 내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 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다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 뿐이다. 오늘 처음으로 뒤풀이에 따라가지 안았다. 뒤풀이에 안가는 마음을 먹으면서, 나 스스로 이 행복을 끊는 실험을 한번 해보았다. 지하철 역을 내려가는 동안 아쉬움이 넘쳐 나를 짓눌렀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마음 먹지 않으면, 이 행복속에 내가 중독되어버릴까봐 일부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띄며 지하철에 몸을 담았다.

  역시 또 책을 폈다. 이 시간대에 또 사람이 별로 없다. 앞에는 한 커플이 나란히 앉아 즐겁에 이야기를 나눈다. 저 여자가 가고 내가 저기 않으면 남자의 행복을 뺏는 일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던 찰나 여자가 일어나 자리가 생겼다. 앉고나니 옆의 남자에게 왠지 미안해 졌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다시 책을 폈다. 아까 아는 형이 책 내용을 미리 스포일러 해버려서 조금 흥미가 떨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그래도 역시 재미있다. 야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상실의 시대는. 섹스앤더 시티 드라마도 그려려니 하며 봤던 나지만, 상실의 시대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무난히 읽는다. 이런거에 무뎌진걸까? 아님 상상력이 풍부한걸까? 나 스스로를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있긴 하지만, 뭐 그건 그거대로 넘기고 책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의 상상력을 인정하고 보는 것이 책을 더 즐겁게 즐기는것 아닐까? 말도 안되는 내용들도 말이 된다 생각하고 즐기니 책이 한결 부드러워 졌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간다. 온통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들 뿐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이다. 그 사실들을 인정하고 책을 읽고있자니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나의 모습이 조금은 걱정이 된다. 그래도 읽는다. 책을 읽은 한시간동안 아무 생각없이 책장을 넘기는데만 몰두한다. 책에 빠져있으면 무언가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하다. 문학은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작가의 세계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면, 현실의 사람들은 전부 단순무식용감한 사람들로만 비춰진다.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감수성을 담아 책을 읽고 있자면 현실의 인간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 없다. 문학을 느끼지만 느끼는대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은 외로움을 안겨준다. 문학은 그래서 외롭다. 빨리 책을 다 읽고 술한잔 하며 감상에 잠겨봐야 겠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금정역을 나온다. 책을 덮고 역을 나오니 와타나베가 나오키가 있던 요양원을 나오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왠지 그런 기분이어야 할 것만 같다. 책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계속 읽고싶지만 내일 출근을 해야하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속물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꽤나 계획적으로 사는 편이다. 물론 계획한대로 살지는 않는다. 의지도 꽤나 부족한 인간이니까. 난 이런 내가 좋아 그렇게 산다. 하지만 이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거 같다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곤 한다. 현실의 나는 문학속의 주인공과 다른 모습일까? 문학의 주인공처럼 생각해도 그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꽤나 폼나는 외모를 가졌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겉포장이 이쁘면 열어보고 싶지 않을까? 아직 내 본질이 열려본적은 없는거 같다. 한번 정도? 다들 나를 열어보기도 전에 나를 버렸다. 아니 내가 나를 던졌다. 그래서 버려졌다.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나를 열어 보이는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전혀 흥미로운 인간도 아니고, 전혀 관심받을 인간도 아니고, 전혀 매력적인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다들 아니라고 하지만 결론을 보면 내 말이 맞다. 아무도 나에게 흥미를 주지도, 관심을 주지도, 매력을 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문학의 주인공 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나에게 맞지만, 로멘스따위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문학은 인간을 외롭게 한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금 그런 사랑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내 포장을 신경써야 할까? 아니면 행동? 아니면 내 안의 모습을 더 보여주려 노력해야 할까?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두렵진 않다. 그런것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도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내 감정을 조절 못하는것 보다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내 인생을 살고 싶은데 내 사랑속에서 나는 나를 억압해야 살아남은다. 그렇지 않으면 난 또 나를 던지게 되고, 나는 또 버려질 것이다. 마냥 즐거운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는데, 미래가 우울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에 다시한번 도전한다는 일은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지고 걱정스럽다. 크게 화상을 입은 일도 아닌데 화상을 입을까봐 조심스러워 진다는 것은 정말 슬픈일이다. 모르겠다. 항상 그렇지만 모르겠다. 나이 스물먹은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말도, 레이코의 말도 들어주는 마음 착한 남자이지만, 나에게는 그런말을 해줄 여자가 한명도 없다. 솔직해 지고 싶다. 솔직한 내 감정을 드러내고 싶다.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런거에 초연해 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주기도, 솔직하게 받기도 모두를 두려워 하는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씩 죽여나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때문에 힘들다.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지 못하고 조금씩 죽여가며 산다는건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다. 힘이 빠진다. 생각하면 할수록 힘이 빠진다. 그 자아의 크기가 의욕을 잃게 되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면 영영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전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것이 인생이라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고민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 나는 나도 모르게 일말의 의욕을 다시 찾을테고, 잘되면 장땡이고 못되면 난 또 일보 후퇴하겠지. 그 후퇴의 날이 언젠가 오게 될것을 두려워 하며 긴 장문을 마치고 나는 오늘도 불편한 잠자리에 든다.

by 태방 2007. 8. 29. 00:24